제목 없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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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5 17:34조회 59댓글 3이한솔
그곳에서 나와, 에러의 발걸음은 다시 정처 없이 이어졌다. 무채색의 풍경은 끝없이 펼쳐졌고, 그의 몸은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마치 모든 의미가 증발해버린 지도 없는 방랑처럼.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걸었을까. 시간이라는 개념조차 무의미한 영혼의 세계였다. 그의 닳아 해진 신발은 잿빛 먼지 위를 미끄러지듯 떠다녔고, 무채색의 공허 속에서 울리는 그의 발소리만이 그가 아직 '존재'함을 희미하게 증명했다. 텅 빈 눈동자는 앞만 응시했고, 그 시선 속에는 아무런 기대도,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잿빛 평원 한가운데, 불가능해 보이는 어둠 속에서 오직 한 곳만이 흐릿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빛이라기보다는, 어둠 자체가 희석되어 생긴 틈새 같았다. 낡고 해진 목재 문. 그 문은 평원에 존재할 수 없는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모든 것이 정지되고 빛마저 무채색인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숨 쉬는 듯한 질감을 가진 존재였다. 문 너머는 마치 깊은 심연처럼 어두웠지만,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은 에러의 텅 빈 시선에 묘한 끌림을 주었다. 마치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목마른 이가 물을 찾듯, 혹은 어둠 속 나방이 불을 향하듯, 에러는 망설임 없이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마비된 듯한 손끝에 아련히 전해졌다.

끼이익—

오래된 뼈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기이하게 뒤섞인 냄새와 소리가 밀려 나왔다. 숙성된 알코올의 시큼한 향, 오래된 먼지 냄새,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망자들의 한숨 섞인 속삭임 같은 소리.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단번에 불쾌함을 줄 법한, 그러나 죽은 자들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인 듯했다. 이곳은 '마네스(Manes)', 영혼의 세계 속 또 다른 세상이었다. 어둡고 침침한 실내는 망자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낡은 테이블과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지만, 모두의 눈빛은 에러처럼 텅 비어 있거나, 아니면 잃어버린 과거의 잔해를 더듬는 듯 아득했다. 간혹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 나직한 중얼거림, 그리고 누군가의 마른 기침 소리만이 간간이 정적을 깨뜨렸다. 이곳의 모든 망자들은 마치 희미한 잔재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에러는 바의 가장자리를 따라 삐걱거리는 의자로 향했다. 그의 긴 팔은 마치 늘어진 광대 인형의 팔처럼 천천히 움직여 높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마른 나무토막처럼 굳은 자세였다. 그가 앉자마자, 정갈한 차림의 바텐더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얼굴은 다른 망자들처럼 창백했지만,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눈빛이 에러의 텅 빈 가면을 응시했다. 마치 그 가면 너머의 그림자들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손님, 무엇을 드릴까요?”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 메마른 나무껍질이 서로 스치는 듯한 소리였다. 에러는 자신의 목에서 어떤 소리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소리를 낼 의지조차 없었다. 그의 인형 같은 입술은 그저 벌어지고 닫힐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은 저절로 열렸다. 그 순간, 그의 내면에서는 '뒤틀린 슬픔의 조롱자'가 얇은 가면 뒤에서 살짝 비틀린 미소를 지은 듯했다. 광대에게서 떨어져 나간 채 조롱만이 남은, 서늘한 미소였다.

“이곳의 밤을 담은 것으로.”

바텐더는 에러의 말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알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보이지 않는 병과 잔을 꺼내기 시작했다. 투명한 공기 속에서 액체들이 저절로 담기고 얼음이 스스로 부서지는 듯했다. 알 수 없는 푸른색, 잿빛, 붉은색 액체들이 은은한 광원을 배경으로 혼합되며 흐르는 듯했다. 흔들리는 잔 속에서 색들이 뒤섞이고 사라지며 새로운 색을 만들어냈다. 차가운 유리잔에 스미는 희미한 냉기. 완성된 칵테일은 마치 새벽녘 하늘의 잔해를 담은 듯, 깊은 밤의 정적과 슬픔, 그리고 한 줄기 희미한 희망이 얽힌 듯한 신비한 색을 띠고 있었다. '잿빛 눈물(Ash Grey Tears)'. 바텐더가 이름을 읊조렸다. 에러는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 닿는 것은 차가움과 씁쓸함, 그리고 아주 희미한 단맛이었다. 그것은 감정 없는 에러에게 잊었던 과거의 기억처럼 낯설면서도 익숙한 맛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즐기던 달콤함 속에 드리워진 쓰디쓴 그림자 같았다.

바의 중앙에는 둥근 형태의 작은 무대가 있었다. 그곳은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공간이었지만, 에러뿐 아니라 모든 망자들의 텅 빈 시선이 자석처럼 이끌리는 곳이었다. 그 무대는 공허한 욕망들을 표출하는, 꺼지지 않는 횃불 같았다. 망자들의 시선은 빛 바랜 나비처럼 그 무대 주변을 맴돌며, 마치 아직 끝내지 못한 영원한 연극을 갈구하는 듯했다.


p.s
저 이런 곳에서는 인기가 없네요.. 그래도..! 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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