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다들······ 수고하셨어요.”
그는 조종기를 손에 쥔 뒤 엔진의 출력을 낮췄다. 덜그럭거리던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다들 에블린에게 들었겠지만, 인공지능 자체 업데이트 도중 오류가 하나 생겼어요. 자는 중이라 발견이 늦었고, 당연히 발견해야 했던 소행성의 발견이 늦은 거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직까지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잠에서 깬 뒤부터 중력에 이상이 생기고, 인공지능이 고장나고, 소행성이 충돌하고, 우주선이 두 개로 찢어지기까지 고작 20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제임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주선의 평면도를 봐 주세요.”
그의 손짓에 따라 망가진 우주선의 구조가 훤히 드러났다. 그것은 완전한 우주선의 모양이었지만,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소행성을 직격으로 맞은 후면 모듈엔 모두 열몇 개의 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창고부터 의료실까지 다양했다.
“창고가 날라간 턱에 식량이 10분의 1도 안 남았어요. 식당에 보관했던 소량의 식량과 몇분 전 창고에서 가져온 긱량이 전부란 말입니다. 게다가 연료도 완전히 바닥났어요. 이것만 가지고 지구로 귀환하기엔 턱도 없습니다.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요.”
“말이 돼요?”
제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치고 나온 건 그동안 줄곧 말이 없던 한수였다.
“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잠자코 다 죽으란 말 아닙니까? 식량도 그 정도면 열 명이서 하루에 한 끼 먹어 고작 일이년 버틸까 말까 한 수준이잖아요.”
전부 맞는 말이었다. 제임스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지금만 살아남은 것뿐이지 언젠간 죽고 말 것이었다. 한수의 말에 승무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불안스레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수의 말에 동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곧 죽을 거라는 두려움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세빈과 제이크의 눈빛만은 달랐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세빈이 입술을 옴짝달싹 못 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자연과학 계열에서 박사 학위까지 따낸 그들은 둘끼리만 전문 지식을 속삭이며 이 상황을 물리학적으로, 수학적으로 타파하기 위해 논의하고 있던 것이다.
“우린 웜홀로 ‘관측 가능한 우주’의 범위를 벗어났어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해결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죠. 게다가 여긴 은하의 중심이라, 아주 밀도가 높아요.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나 그와 비슷한 질량의 천체를 발견한다면 스윙바이 항법을 통해 최소한의 연료로 방향을 조절하고 속력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승무원들의 우려 속에서도 세빈과 제이크는 불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제임스 박사도 세빈의 말에 거들었다.
“제가 물리학은 잘 모르지만, 수학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스윙바이 항법이라는 것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거대질량 천체에 가까이 붙어 그들의 중력을 이용해 속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올리거나 방향을 바꾸는 방법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제임스는 제이크와 세빈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이미 이 방법을 알고 있던 걸까.
“둘의 말이 맞아요. 저도 스윙바이 항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우주선을 조종하다 인공지능이 발견하지 못한 게 소행성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어요. 주변에 생소한 천체들이 많더군요. 조금 더 깊게 파봤더니, 약 500AU정도 떨어진 거리에 태양 질량의 천만 배 이상에 달하는 초대질량 커 블랙홀이 하나 있더군요. 아, 잘하면 스윙바이도 도전해볼 수 있겠다, 싶었죠.”
500AU라면 빛의 속도로 3일간 이동했을 때 도착하는 거리 정도였다. 충돌하기 전 속력을 최대한으로 올려뒀기 때문에 현재 우주선의 속력은 1/20c 정도였다. 블랙홀까지 이동하려면 60일 정도가 걸리려나, 어쩌면 블랙홀의 중력 범위에 다가갈수록 가속도가 커져 훨씬 더 짧은 시간만에 도착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임스가 덧붙이자 승무원들의 표정이 한층 풀어졌다. 제임스가 승무원들에게 눈짓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아직까지도 우주선이 충돌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얼덜결에 끄덕거린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 동감한 셈이 됐다. 제임스는 장난스럽게 웃곤 이 계획을 ‘스윙바이 프로젝트’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실제 작전에 비해 단촐하고 별 거 없는 이름이었지만 스윙바이 항법이 계획의 중심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부르기 편했기 때문에 모두 동의했다.
“그럼 저희는 이제 뭘 해야 하죠······?”
리사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반쯤 미친 제이크나 에블린과는 다르게 정상인처럼 보였다. 앞으로 그녀는 다친 사람을 돕기보단, 여러모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사실······.”
제임스는 승무원들의 눈치를 보며 말하기를 꺼려했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무슨 일 있어요?”
리사는 그 적막이 불길했는지 제임스의 어깨를 붙잡곤 흔들며 그를 재촉했다. 마지못한 제임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제가 하나 있는데······ 식량이 생각보다 많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더 많이요. 식량을 아낄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하나밖에 없더군요. 그게 동면기였어요.”
그 이야길 듣자 제이크가 눈치 없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충격이 컸던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본 제임스가 억지로 웃었다.
“제이크가 두 개 가져와준 덕에 총 네 개네요. 다들 알다시피 동면에 들어선 사람은 생체활동이 거의 멈춘 수준으로 느려져서 음식을 먹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어요. 식량 낭비를 최소화하려면 동면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원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없다면 투표로 뽑는 게······.”
제임스가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태연하게 잠이나 자고 싶은 사람은 없다. 투표로 동면할 사람을 정한다는 건, 앞으로의 우주 여행에서 필요 없을 사람을 방출하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임스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모두는 그렇게 느꼈다.
“동면기 네 개를 모두 가동시키는 게 효율적이겠죠······?”
클로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애꿎은 벽면만 쏘아보며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했다. 본인의 미래를 잘 알고 있음이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원하는 사람이 없다면, 굳이 투표해야 한다면 나 역시 생물학자인 클로이로 정할 테였다. 식물 재배실이 후면 모듈에 딸려나간 지금 그녀의 역할은 없었다.
제임스가 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이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원할게요.”
클로이가 말했다. 어쩌면 투표로 끌려나가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더 비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도 지원하겠습니다.”
머뭇거리던 앤디 산체스도 끼얹었다. 그는 통신 전문가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구에게 통신한다고 돌아오는 답변은 없을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지구에게 연락한다고 해도, 100억 년이 훨씬 지나서야 겨우 도착하겠지. 그 둘의 자원으로 모두가 한층 우울해졌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말리지는 못했다. 자원하지 않으면 투표였다. 혹시라도 자신이 뽑힐 가능성이 있었다. 자원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당사자가 아닌 개인에게는 무섭도록 득이었다.
한명한명 모두 우주선에 필요한 사람 뿐이었다. 최정예로 열 명만 뽑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제임스야 당연히 필요하다. 우리의 중심이며 승무원을 통제할 유일한 사람이다. 세빈과 제이크도 물론 필요했다. 인공지능이 고장난 지금, 스윙바이 항법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가졌고,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은 그 둘밖에 없다. 한수와 에블린도 필요했다. 반쯤 고장난 우주선에서 엔지니어는 그들뿐이다. 그래도 고칠 시도는 해야 하니까. 비록 의료실은 날아갔지만 리사도 중요했다.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패닉 온 승무원들을 달래는 건 그녀의 역할이었다.
솔직히 나는 애매한 위치였다. 위치로는 KAI의 수장이긴 하지만, 리더의 역할은 제임스가 나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게다가 난 이러한 돌발 상황의 경험도 없고, 세빈이나 제이크처럼 특출난 지식도 없다.
“자원하겠습니다.”
끝내 미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제 마지막 한 명이다. 고민은 짧았다. 남은 이들 중 가장 필요 없는 건 나였다.
“저도 자원할게요.”
그 말에 제임스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나 역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말린다면 나 대신 들어갈 다른 동면자가 생길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동면을 자원한 사람들의 눈을 바라봤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말할 수 없는 굳건함이 느껴졌다.
“다들 감사합니다······. 꼭 살려서 깨워드릴게요. 약속합니다.”
제임스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였다. 앤디는 웃으며 제임스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감사하긴 뭘! 너네 개고생할 때 우리 누워서 여행하는 건데. 약속 꼭 지키기야.”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안전한 방과의 통로에는 셔터를 다시 올렸고, 망가진 우주선을 천천히 정리해나갔다. 우주선 후면 근처에 빈 방이 하나 있길래 그곳을 동면실로 다시 정한 뒤 동면기를 옮겼다. 에블린은 그 방에 동면기를 연결해 전기가 통하도록 했다. 동면기는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 안전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이내 나는 동면기에 누웠다. 이 모든 것이 충돌한 뒤 다섯시간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동면하지 않는 여섯 명이 동면실에 서서 우릴 내려다보았고, 그들의 걱정 사이 우린 동면기를 작동시켰다.
“다들 안녕히······.”
닫히는 문 사이로 제임스의 속삭임이 들렸다. 동면기를 사용하는 건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왜인지 자고 싶어졌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 저기, 저기요.
제 목소리 들려요? 우현 씨!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깊은 잠을 잔 것처럼 몸이 노곤했다. 날 깨운거면 결국 지구로 귀환에 성공한 걸까. 다행이었다. 난 천천히 눈을 떴다. 투명한 동면기 밖으로 리사의 걱정스런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나에게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동면실은 불이 꺼져 있어 아주 어두웠고, 리사의 얼굴도 동면기에서 나오는 빛으로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지구로 귀환했다면 여섯 명이 모두 나와 환하게 웃으며 우릴 반겨줬을 테였다. 동면기에선 한 달간의 동면이 어땠냐는 상투적인 말소리가 들려왔다. 잠에 든 지 고작 한 달이 지났다. 아직 지구로 귀환하지 못했다는 확신이 그제야 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내가 물었다. 리사는 대답하는 대신 다급하게 동면기의 전원을 끄곤 문을 열었다. 난 몸을 일으켜세웠다. 몸이 찌뿌둥했지만 그렇게 오래 잔 느낌은 아니었다.
“우현 씨. 지금 깨우게 된 거 정말 죄송해요. 놀라지 말고 들어요.”
리사가 날 뚫어져라 쳐다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정말이지 처참했다. 머리카락 정리는 제대로 되지 않아 푸석했고, 피부는 금방이라도 살점이 떨어질 것처럼 갈라졌다. 창백한 얼굴에 다크서클은 턱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내가 달래듯이 말했다. 리사는 몇 번 심호흡하더니, 겨우 말했다.
“제임스와 한수가 일주일 전에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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