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무색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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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4 11:49조회 58댓글 4유하계
자상무색: 얼굴색을 하나도 안바꾸고 자기자신을 상처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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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아, 내가 마지막으로 본 세상은 너여야 했어. 녹슬어 작동되지도 않을 것 같은, 보리차 색 생수가 들어있는 저 자판기도, 바닥을 나뒹구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도 아닌 너여야 했다고. 아무 사람 없는 낡은 폐허에서, 사람들이 다 죽어 사라진 이 외딴 마을에서 목이나 메고 있으려니 네 생각이 갑자기 나네.

모든게 다 내 몹쓸 눈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미안하다. 솔아, 내가 죽으면 넌 내 생각 말고... 나한테서 벗어나서 새 삶을 살아. 이게 내 마지막 부탁. ...아, 마지막이라니, 좀 드라마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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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나보다 큰 키의 솔에게 안겨 솔의 냄새를 킁킁 맡아댔다. 왜인지 그러고 싶었다. 솔의 온기와 체취가 그렇게 안정을 주는 향이였던가. 그렇게 한참을 안겨있다 다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 천천히가 내 모든 불운의 서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람 없는 골목길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전에도 한 번 맡아봤던 냄새였다. 무슨 냄새지, 하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피비린내. 성별을 알 수 없는 깡마른 피범벅의 사람을 보고 알아챘다. 항상 솔의 집에서 쭉 직진하다, 여기서 꺾으면 내 집이 나왔다. 그 꺾는 길에서 살인현장을 목격한 것이였다. 패닉이라면 패닉이 왔다. 숨이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커다란 핏덩이만이 보였다. 피범벅의 사람을 계속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도망치려 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치려는 몸에 내가 이끌렸다. 일단 집에 들어가 경찰에 신고하자. 그럴 생각으로 달리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옷을 붙잡았다.

켁-!

“뭐야? 새끼, 경찰에 꼰지르는 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기분 나쁘게 생긴 남자가 내 뒤에 서있었다. 눈을 깔려고 시선을 내리는데 피범벅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그 사람의 눈을 보았다. 그 사람의 눈을 보는 순간 괜한 기시감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그 때 비웃듯 범인이 웃으며 내게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닌가.

“꼰지르지도 못하게 생기긴 했는데... 뭐, 말은 해두면 좋으려나. 경찰에 꼰지르면 니도 이렇게 되는거야. 알아들은 건 맞지?”

나는 그에게 잡힌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았고, 내 무게가 버거워 몸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범인은 날 보고 한 번 비웃는가 하더니, 이내 나를 놔주었다. 목격자를 놔준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였으나 그에게 다시 잡히기라도 할까 미친 듯이 달렸다. 뒤에서 그가 다시 한 번 경찰에 대한 경고를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무시해야 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눈 앞이 하얗게 흐릿해졌을 때 쯤, 나는 집보다 훨씬 먼 곳에서 멈췄다.
순간 든 생각은, 솔의 얼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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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경찰에 신고하려했다. 솔에게 사정이 생겨 만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발신자 뭐시기... 사실 솔인줄 알고 확인도 안하고 바로 받았다. 전화기에서 들려온건 솔의 목소리가 아닌 그 날 밤 악몽의 목소리였다.

- 너도 죽여버린다.

대부분을 듣지 않고 흘렸다. 마지막으로 그는 죽여버린다, 라고 하고 끊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바로는 당장이라도 찾아와 날 죽일 기세였기에, 현관문 앞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러다 솔에게 피해가 가면 어떡하지. 조용히 있는게 맞는걸까. ...이걸 무시하는게 맞는걸까. 내가 가만히 있다한들, 범인은 나에게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보면 솔도 당연히 이를 알게 될 것이고, 솔은... 나에게 실망할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솔을 밀어내야겠구나.
나 때문에 네가 다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서 멀어지는 쪽이 옳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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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수월 후속. 맘에 안들어요...
고요야 기대할게!!
https://curious.quizby.me/Y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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