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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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2 00:50조회 7댓글 1소야
0.



눈 꿈뻑 감았다 뜨면 태양이 빛나고 있다. 사실 태양은 아니고 아우렐이다. 그것두 옛날 정보책 뒤져서 겨우 알아낸 이름인데 아마 여기 사는 사람 대부분은 모를 듯. 그냥 태양이라 부른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우리 밟고 있는 땅도 지구라고 부른다. 어른들이 그렇게 부르라고 했으니까. 여기가 지구가 아닌 것도 알고 태양이 태양이 아닌 것도 아는데 그냥 그렇게 불렀다. 그건 사유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진 윤리 같은 것이었다. 꼭 태양이라 불러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지 않는 애는 좀 모자란 애로 낙인. 저건 태양이 아니고 아우렐인데 해봐야 진지충 취급만 받겠지.


그래서 사유는 오늘도 아우렐을 아우렐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침 기도 시간만 되면 읊어대는 태양님 부디 행복을 태양님 가정에 화목을 태양님 태양님 사이에서 혼자 소리 없이 기도했다.


전 그냥 제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아멘.















1.



근데 가짜 지구에 진짜 인간이 와 버렸다.


원인은 사고. 사고사는 아니고 그냥 사고다. 원래 다른 행성으로 가야 했는데 중간에 워프 통로를 착각해서 돌고 돌다가 근 몇백 년은 사람 발길도 안 닿았던 에우리 행성에 도착. 태양에서부터 휭 날라오는 게 진짜 신인 줄. 사유는 멀리서 그 모습 보면서 입이나 떡 벌리고 있었다. 그 인간은 유명인이라도 된 것마냥 머리 헝클어가면서 이런 식으로 말했다. 철도 잘못 탔고요. 폐쇄된 철도라서 저 말곤 인간 안 올 거고요. 에우리 행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배워서 알고 있고요. 기술 몇 개 드릴 테니까 연료 좀 주세요. 행성 이름이 에우리인 건 사유도 그 말 듣고 나서야 알았다.


가짜 세계에 진짜가 나타났다. 사유는 한바탕 난리 날 거라고 예측했는데 세상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에우리 행성을 지구라고 부르는 일도 아우렐을 태양이라 부르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딱 하나 있다면 티비에 새로운 얼굴이 자주 보인다는 거. 생긴 건 우리 가짜 인간들이랑 크게 다를 건 없는데 왠지 모를 위화감 같은 게 들어서 사유는 인간이 나올 때마다 채널을 넘길 수가 없다.


가짜 지구와 진짜 지구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괴감 드니까. 지금껏 믿어 온 것들이 진짜에 밀리는 경험 같은 거 하고 싶은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엠씨들은 괜히 우주선 기술이나 들먹였다. 기술이 되게 좋은데 무슨 기술을 전달해줄 수 있는지. 인간은 주머니에서 알아볼 수 없는 구체 같은 거 툭 꺼내고 원리는 자기도 모르니까 알아서 그짝들이 연구해 보세요 한다. 싸가지 좆 돼. 사유는 저런 유명인 만날 일도 없겠다 인간 낯짝 구경 좀 해보자 싶어서 프린트 한 담에 폰케이스 사이에 끼워 넣었다. 사실 얼굴이 좀 봐줄 만 해서 그랬다는 건 안 비밀.


아니 근데 에우리가 지구보다 배는 작다는 얘기를 했던가. 하필이면 사유가 사는 곳에 떨어진 인간은 하필이면 사유의 언어를 했다. 영어도 일본어도 중국어도 아니고 한국어가 말이 되나. 암만 마스크 쓰고 가짜인 척해도 폰케이스에 떡하니 박힌 진짜 얼굴 사유가 몰라볼 리는 없고. 허억 숨 들이킨 뒤에야 간신히 깨달은 거 하나. 아 맞다 여기 도서관이지. 책 몇 개쯤 쌓아 둔 사람들 눈치가 매서웠다. 사유는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린 채로 900번 역사 쪽을 향해 발을 옮겼다. 거기에서 인간이 책장을 훑어 보고 있었다.


"너, 인간."


인간의 어깨를 두어 번 건드렸다. 고개 돌린 인간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갔다. 티비로 볼 때는 그렇게 커 보이진 않았는데 생각보다 키가 꽤 되는 듯. 아마 백팔십 오 정도. 사유는 검은색 눈동자 보면서 생각했다. 나 이제 무슨 말 해야 되지. 사유가 어떻게든 할 말 생각해내는 동안 인간은 참을성도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더러 맘 급해진 사유의 눈에 딱 들어온 책 하나. 그건 사유에게 처음으로 에우렐이란 이름을 알려 준 태양의 역사란 제목의 책이었다.


"그, 태양, 에우렐!"


태양, 까지는 심드렁하던 인간은 에우렐, 하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역사 칸을 뒤지고 있던 걸 보면 이쪽 역사에 관심이 있단 뜻이고. 역사는 질리도록 배워 왔으니 사유도 그 관심에 적당히 어울려 줄 생각. 태양의 역사를 무려 세 번이나 완독한 사유는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책의 내용을 전부 읊을 수 있었다. 그 중 무슨 내용을 인간이 좋아할까 생각하다 떠올린 부분이 있다. 그 책에 교묘하게 빠져 있던 사실들. 그래서 도대체 왜 우리의 태양은 신성화되는가. 우리는 왜 에우렐을 태양이라 부르기 시작했는가. 사유는 본능적으로 그 질문에 인간이 관심을 가질 걸 알았고.


"에우렐이 왜 태양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인간은 알아요?"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문장을 어버버 뱉었다. 인간은 눈치 보는 것처럼 주윌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사유는 제멋대로 입이 벌어졌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아냈다. 가린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콧대가 너무 뾰족해서. 폰케이스에 끼워 넣은 사진이 짓고 있는 뚱한 표정이랑 제 앞의 인간이 크게 뜬 눈이 너무 비교돼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이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입꼬리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지금껏 알고 있던 게 전부 가짜라는 듯이 화려한 얼굴로 웃고 있는 인간을 바라보면서 사유는 너무나 눈이 부신 나머지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세로."
"네?"
"인간이 아니고 세로라고."


"내 이름."















2.



이름이 사유인 사유는 사유하고. 이름이 세로인 세로는 세로로 길다. 아아 복잡해. 이름 체계도 가짜와 다를 것이 없어 사유는 머리가 아프다. 그러니까, 세로의 말에 따르면. 아마 삼백년 전쯤에 인류는 진짜 대차게 망해 버렸다. 태양의 이상 활동이 발견된 것이었다. 전문가들의 집중 연구 끝에 겨우 밝혀낸 건 겨우 지구 멸망이란 결론이 끝. 사실 원인이고 여러 가지 있는데 세로는 이과가 아니라서 자세한 거 모른댔다. 그래서 지구 대체품을 서둘러 찾았다. 멸종 앞에서 노동력 총동원의 힘은 꽤 강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완벽한 뉴 어스를 찾았는데 하필이면 이미 지성체가 존재. 그것도 꽤 발전했다. 생긴 것도 똑 닮았고 놀라울 정도로 유전자도 일치. 이 정도면 진짜 같은 종 아니냐고.


아무튼, 그래서 현지인을 죽이냐 마냐로 말이 많이 나왔다. 인간도 아니면서 인권 보호 피켓 들고 나선 것들 때문에 일단 공생해보자는 결정이 내려졌고. 최정예 인간들이 그쪽으로 워프 통로 뚫은 다음 날라간다. 진화 덜 된 생명체에게 대뜸 기술이나 문화나 주입. 너넨 이제부터 지구인인 거다 알았지. 인간의 기술력 두 눈으로 확인한 에우리인들은 멸종 안 당한 것에 감사할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걸 갑자기 태양 이상 활동이 갑자기 사라졌고 인류 멸종 안 한댄다. 에우리에 파견 간 인류 최정예야 당연히 소식 듣자마자 도로 지구로 돌아갔다. 인간이 태양이라 이름 붙인 아우렐 방향으로 우주선 타고 올 때처럼 한순간에 홱 날아가 버렸다. 우주선 잔상이나 바라보면서 에우리인들은 그런 생각을 했겠지. 일 년만에 거진 조선시대에서 이십일세기까지 진화시킨 인류는 신이다. 이건 기적이다. 당연하게도 에우리인들은 지구인의 자세한 사정 따윈 잘 몰랐고. 인류가 언젠간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되면 에우리는 지구가 되고. 아우렐은 태양이 되고. 그렇다면 우리도 인류와 마찬가지가 되는 거 아닌가. 신기루처럼 왔다 간 인간은 신성시되기 시작한다.


"......그게 끝?"
"그게 끝."


세로와 사유는 동시에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린다. 각자 나름대로 에우리의 비어 있는 과거와 현재를 짐작하고 있었다. 세로가 말해준 건 고작 비어 있는 일 년 간의 기록 뿐인데 그제야 모든 게 들어맞는 느낌. 그러니까, 에우리인들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작 진짜 태양의 변동 때문에 한 행성의 미래가 완전히 바뀐 것이었다.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지구로 가져가면 꽤 이슈가 되겠어."


세로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잣말인지 대꾸해 달라는 건지 고민하던 사유는 작게 그러게요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로는 휴대폰에 뭘 그렇게 길게 써 둔 건지 글자 빼곡한 메모장 스크롤을 쭉 내렸다. 아마 음성 대화 요약하기 같은 기능을 켜 둔 것 같았다. 정부한테 폰 받은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사유보다 기능을 더 잘 쓴다. 사유는 역시 진짜 인류는 다르구나 싶었다.


"너 지구에 대해서 궁금한 거 있어? 물어보면 다 답해줄게."


세로가 휴대폰을 바닥에 뒤집어 놓았다. 사유는 궁금한 거 당연히 졸라 많아서 아싸리 좋아했다. 티비에선 되게 싸가지 없어 보였는데 질문도 받아주고 되게 착하다고 생각하면서 사유는 머릿속으로 질문 리스트 짰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이어지는 세로의 목소리. 그러니까-


"너도 알려줘. 내가 물어보는 것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지구로 들고 가고 싶거든.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질문 리스트가 팍 식었다. 지구 이름에 진짜라는 꼬리표가 붇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단순 선의일 리가 없지 생각하면서도 속이 상했다. 왜 속이 상하는진 사유도 몰랐다. 그냥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그래요."


근데도 사유는 세로를 더 오래 보고 싶어서. 진짜 인간이랑 조금만 더 친해지고 싶어서. 아니 전부 다 버리고 사실은 그 얼굴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그냥 그렇다고 했다.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다음 사유는 몰래 고갤 들어 세로를 올려봤다. 줄곧 사유를 쳐다보고 있던 건지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쳤다. 세로는 웃고 있었다. 오른쪽 입꼬리가 왼쪽보다 살짝 더 올라가 있는 게 왠지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사유는 열이 올랐다.


"그럼 시범 삼아 대답해줄 테니까 궁금했던 거 몇 개만 미리 물어볼래?"


시범 운행 같은 건가 싶어서 사유는 조금 웃겼다. 머리를 스치는 몇 가지 질문들. 지구 어디까지 발전했어요. 이건 문과 세로가 모를 것 같아서 제외. 여기에서 지구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려요. 갈 일도 없는데 왜 물어봐. 제외. 그런 식으로 몇 개쯤 제외하니 머리에 두 개가 남았다.


"벚꽃 진짜 분홍색이에요?"


세로가 소리 내 웃었다. 배까지 부여잡고 웃는다. 이게 웃긴 질문은 아닌데. 나름 진지하게 물었던 사유가 떨떠름하게 따라 웃었다.


"아니, 안 따라 웃어도 돼.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네. 당연하지."
"그럼 연한 분홍이에요."
"내가 메모장에 그려 줄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화면을 내밀었다. 연한 핑크빛에 살짝 보라가 섞여 있는 느낌. 와아 예쁘다 소리 내서 말했더니 세로가 다시 웃었다. 사유는 같이 웃는 대신 서둘러 두 번째 질문을 물었다.


"그럼 지구에는 진짜 달이 떠요?"
"응. 달이 떠."
"달은 저녁에 뜨잖아요. 그러면 저녁도 낮처럼 환해요?"
"그건 아니고."
"그럼 어때요?"
"지구에서 보면 태양이랑 크기가 똑같애. 딱 너네 아우렐 정도 되는 듯."


말꼬리 잡듯 같은 주제로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태양은 계속 낮에만 뜨고 달은 계속 밤에만 떠요? 근데 위성이 뭐예요? 달은 생긴 게 계속 바뀐다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사유가 질문하는 게 아니라 세로가 자문자답하는 수준까지 갔다. 달에서 지구의 도넛까지 주제가 옮겨간 뒤에야 세로는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대화가 너무 딴 길로 샜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구 얘기 잘 듣던 샤유는 좀 아쉬웠다.


"나 이제 가봐야 해."
"연락처 드릴까요?"
"응. 주라. 나 아직 번호 못 외웠어."


사유가 칠삼일 어쩌고 번호 읊고 세로는 그 리듬 맞춰서 번호 따라 쳤다. 다른 건 다 똑같은데 번호 갯수가 좀 다르네. 우린 숫자 열한 갠데. 세로가 번호 치다 말고 중얼거렸다. 아 잠시만 놓쳤어. 다시, 다시. 그 말에 사유는 첨부터 숫자 다시 읊었다. 이렇게 말 많은 거 티비에선 어떻게 숨겼대. 세로가 제 번호 찍혀 있는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이 번호 맞아? 자세히 보니 공 하나가 구로 잘못 쓰여 있다.


"구 말고 공이요. 이거 다섯 번째."


아아 잘못 들었다 수정할게. 인간은 다 완벽할 줄 알았는데 이게 뭐람. 허우대 멀쩡하게 생겼는데 코딩이 잘못 된 것처럼 허둥지둥. 사유는 왠지 비싼 거 샀는데 하자품 온 것처럼 기분이 찝찝했다. 번호 수정 다 끝내고 저장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세로가 폰 들고 제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팔은 대각선 사십오 도. 팔도 길쭉한 게 전부 뻗어서 찍으면 그 작은 얼굴이 보이긴 하나. 셀카 찍어 본 경험도 없어 보이는데 세로는 열심히도 찍었다. 눈살 찌푸리고 그 모습 바라보기도 잠시, 갑자기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징 울렸다. 모르는 번호에 메세지가 와 있었다.


(023-XXXX-XXX [사진])
(023-XXXX-XXX [사진])
(023-XXXX-XXX [사진])
......


한두 장도 아니고 무려 열 장. 전부 셀카에 딱 한 장 사유를 몰래 찍은 것도 있었다. 사유는 휴대폰에 찍힌 세로와 앞에 앉은 세로를 번갈아 봤다. 사진발 되게 안 받네.


"선물."
"뭔 소리예요?"
"내 얼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제가요?"


당당한 소리에 기가 막힌다. 저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틀린 말은 아니라 더 열 받았다. 세로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사유의 휴대폰을 가리킨다. 아니, 휴대폰이 뭐 어쩌라고...... 아.


맞다. 사진.


"좋아하는 거 맞네. 보고 싶음 말해. 보내줄 테니까."


세로는 그렇게 말하고 바람처럼 책장들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사유의 혼도 세로랑 같이 쏙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 손으로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근데도 도무지 열감은 내려오지 않았다. 휴대폰 앞뒤로 보이는 세로의 얼굴이 눈부셨다.















03.



"야 이거 진짜 해?"
"흐르니끄여."
"태양한테 기도하라고?"
"몇 번을 말해요."


넓은 예배당에서 작게 기도하는 소리와 그보다 조금 더 크게 떠드는 소리가 울렸다. 당연하게도 떠드는 소리는 세로의 비율 구십 퍼센트. 태양을 향한 기도가 보고 싶다더니 기도는 안 하고 방해만 해 댄다. 태양님 부디 오늘도.....


"태양한테 기도하면 이뤄 줘? 차피 가짜잖아."


아오 진짜. 이 사람은 눈치도 없나. 예배당 마스크 쓰고 온 것부터 마음에 걸렸는데 검은 마스크 뒤로 신성 모독이나 해 댈 줄은. 고개 안 돌리고 옆을 쏘아 보니 세로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사유에게 향한 몸을 슬쩍 고쳐 앉고 목을 다듬는다. 그러더니 어쭈 손까지 모아서 짐짓 기도하는 척을 했다.


태양님 부디 사유가 화 좀 그만 내게 해주시고...


내용이 가관이다. 사유는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부디 안전 귀가하게 해주세요. 아멘.


이어지는 기도에는 웃음이 쏙 들어갔다. 안전 귀가라니 재수 없는 소리. 가다가 소행성에라도 맞아라. 길 잘못 들어서 다시 에우라로 돌아와라. 태양님 세로가 지구로 가는 길 못 찾게 해주세요. 태양님 세로가 에우라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유가 속으로 기도하는 내용은 꿈에도 모르고 세로는 기도 다 끝냈다고 좋아한다. 웃는 얼굴이 미워서 사유는 한 대 쥐어 박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고작 삼십 퍼센트 차 있던 충전 게이지가 거의 팔십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귀환이 머지않았다. 퍼센테이지 올라가는 추세로 보면 아마 이주일 넘게 안 걸릴 듯. 계약 비스무리한 것으로 엮여 있다고 해도 그새 정이 쌓였는지 사유는 세로가 가지 않았으면 했다. 돌아간다는 얘기만 들어도 속이 상했다. 세로는 예배당 밖으로 나오기까지 조잘조잘 떠들더니 성당 밖을 나와서야 목소리를 크게 냈다. 아아 시원해. 말마따나 시원한 바깥바람이 불고 있었다. 곧 가을이 오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니 세로가 대답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계절 이야기를 해 볼까."


이건 고착화된 루틴. 그날치 에우라의 데이터를 전부 수집하고 나면 늘 세로는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언제는 지구의 물고기. 언제는 지구에서 보이는 하루. 또 언제는 인류가 떠난 행성들의 이름과 인류가 만난 외계인들까지. 세로가 봤다는 외계인들 중 인류와 가장 닮은 건 우리 에우리인들이랬다. 그 말이 사유는 왠지 기껍다. 반갑기까지 했다.


"인간이랑 너네랑 유전자 검사해보고 싶다. 같은 종이라고 뜨는 거 아니야?"
"같은 종이란 게 뭐예요?"
"같은 종이면 번식이 된단 뜻이야."


그 말을 이해하는 데만 십 초가 넘게 걸렸다. 뭔 그런 말을 저렇게 태연하게 해. 사유는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제 성정 못 버리는 세로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입방정을 떤다.


"맘같아선 지구로 몇 명 데려가고 싶은데 자리가 안 나. 내가 실수로 연료 날린 거 알면 워프 통로 완전 폐쇄해버릴 텐데. 지구 사람들은 아직 이쪽으로 가는 워프 통로가 뚫려있는 줄도 모를걸."


그 말에 사유는 다시 에우라로 못 오는 거야, 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왠지 붙잡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지 마. 에우라에 있어. 모든 게 진짜일 필요는 없어. 가짜여도 되잖아.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사유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있다.















04.



커피. 세로가 좋아하는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국인들이 대부분 좋아한다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커피 잘 먹지도 않는 사유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랑 복숭아 아이스티 한 개 사서 카페 밖으로 나왔다. 캐릭터 반팔 입고 있는 세로가 거기 서 있었다. 사유는 비슷하게 생긴 복숭아 아이스티랑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구분하려 머리 굴리다 세로에게 하나 내밀었다. 그리곤 곧바로 우웩. 아 이거 아메리카노잖아. 바꿔 바꿔.


세로는 잔뜩 인상 쓴 사유 보면서 포복절도했다. 사유는 세로 웃는 게 좋아서 일부러 더 얼굴 찌푸린다. 으으 맛없어. 우웩. 과장하는 거 잔뜩 티나는데도 세로는 깔깔대며 웃어 준다. 사유는 같이 웃다가도 문득 울적해진다.


충전도 구십 칠퍼센트. 아마 내일이 귀환 예정일. 같이 웃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뜻.


매일 그랬던 것처럼 루틴 따라가던 세로가 정자에 가만히 앉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그러니까 생명체를 꼽는다면 그게 바로 세로. 이젠 마스크 쓰고 걷기만 해도 사람들이 알아봐서 마스크 아래로 음료를 마셨다.


"근데 너 지구 좋아하냐."
"진짜 지구요 아니면 가짜 지구요?"
"진짜 지구."


살짝 고민되는 질문. 사유는 가짜 지구와 진짜 지구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로에게 들은 진짜 지구는 단연코 아름다웠으니까.


"원래 좋아하는 건 오래 기억한다잖아."
"그래요?"
"어. 내가 지구에 있을 땐 그게 상식이었어."


세로는 답지 않게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미뤘다. 뭔갈 말하려고 입을 들썩거리는데 결국은 뱉지 않는다.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근데 넌 왜 지구 얘기보다 내 얘기를 더 많이 기억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차다.















05.



진짜 정도 없지. 인간은 다 이런가. 슈융. 하늘 가르고 날라가는 우주선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흔적만 남기고. 인간이 태양이라 이름 붙인 아우렐 방향으로 우주선 타고 올 때처럼 한순간에 홱 날아가 버렸다. 우주선 잔상이나 바라보면서 에우리인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인류 별 거 아니구나. 인류는 신 같은 게 아니구나. 우리가 겪은 건 기적이 아니라 같잖은 희망일 뿐이었구나. 사유는 지구인의 자세한 마음 따윈 잘 몰랐고. 세로가 언젠간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에우리는 지구가 되고. 아우렐은 태양이 되고. 세로와 사유가 같은 종이라면, 결국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 에우라 인류 그런거 생기는 거 아닌가. 신기루처럼 왔다 간 세로는 신성시되진-않고. 그냥.















06.



멍하니 하늘 바라보는 세로. 걔가 떠난 지 오 분 정도 지난 시점인가. 연락올 곳 없는 휴대폰이 갑자기 지잉 울려덌다. 눈물 닦을 힘도 없어 그냥 뚝 뚝 흘리면서 휴대폰 집어드는데.


(023-XXXX-XXX [사진])


바보 같은 표정으로 브이 하고 셀카 찍은 사진이 업로드. 이거 설마 예약 메세지냐. 사유는 잘생긴 세로 얼굴 해상도 높이려고 꾸득꾸득 기어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0.



눈 꿈뻑 감았다 뜨면 태양이 빛나고 있다. 사실 태양은 아니고 아우렐이다. 그것두 옛날 정보책 뒤져서 겨우 알아낸 이름인데 이젠 은둔 생활하는 몇 명 빼곤 다 알 듯. 다들 그냥 태양이라 부른다. 그렇게 배웠으니까. 우리 밟고 있는 땅도 지구라고 부른다. 어른들이 그렇게 부르라고 했으니까. 여기가 지구가 아닌 것도 알고 태양이 태양이 아닌 것도 아는데 그냥 그렇게 불렀다. 그건 사유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진 윤리 같은 것이었다. 꼭 태양이라 불러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지 않는 애는 좀 모자란 애로 낙인. 저건 태양이 아니고 아우렐인데 해봐야 진지충 취급만 받겠지.


그래서 사유는 오늘도 아우렐을 아우렐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침 기도 시간만 되면 읊어대는 태양님 부디 행복을 태양님 가정에 화목을 태양님 태양님 사이에서 혼자 소리 없이 기도한다.


전 그냥 걔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네요. 그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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