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면 항상 먼저 깨어있는 스승님이 있다. 이현은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하루라도 늦잠을 잔 적이 없으니 말 다 했다. 이브는 가만히 앉아 명상이나 하고 있는 이현 뒤에 섰다. 거기엔 다 부러져가는 목검이 바닥에 떨궈져 있었다. 이젠 눈 감고도 할 지경인 루틴. 이브는 이현 뒤에서 열심히 검질이나 했다. 이현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신경이 안 쓰인다는 듯 무아지경으로 눈만 감고 있었다. 솔직히 이건 방임이다. 본인 다음 가는 세계제일검으로 키워주겠다고 소리치던 사람만 믿고 따라왔더니 하루 종일 명상 하는 한량만 보인다.
- 이브.
더 어이가 없는 건 힘들어서 몰래 쉬려고 할 때마다 귀신같이 목 깔고 이브 이름을 부른다는 점이었다. 이브는 아이씨 한 번 뱉고 다시 목검을 잡았다.
- 다 망가진 목검으로 수련을 어떻게 합니까?
- 그것도 다 시련의 일종이다.
- 용왕이나 따라가서 삼지창이나 배울 걸 그랬어.
- 어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을 섬기려고.
- 당신이 태양입니까?
이현은 태양보단 달에 가깝다. 태양 빛 쪽쪽 빨아먹어서 빛나는 게 딱 이현이랑 똑같다. 이브는 열심히 수련해봤자 돌아오는 건 ‘세계제일검 이현의 제자’라는 명성임을 알고 있어서 조금 짜증이 났다. 이거 봐, 지금도 내 말 다 씹고 이현은 되도 않는 명상이나 하고 있다.
이현은 입버릇처럼 명상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며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그런 것처럼 이현은 하루종일 명상만 하고 검은 얼마 잡지도 않는 주제에 검술 실력은 파죽지세처럼 늘었다. 이브는 정말 명상이 도움이 되나 싶어서 한 달 동안은 이현처럼 주구장창 명상만 한 적도 있었는데, 그냥 잠 자는 시간만 늘었을 뿐이었다. 이름만 명상이지 실제로 이브가 명상 시간에 했던 건 잠 자거나 멍 때리기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뭣같은 산구석에 남아있는 건 검술 실력이 느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기 때문이고, 한량 이현에게도 어느 정도 정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얼마 안 남았다, 하고 버틴 것도 오 년이 넘어간다. 이현을 열다섯 때 처음 만났던 이브는 이제 스물을 바라보고 있다. 정이 안 드는 게 더 이상했다.
- 이브! 밥 먹자.
가끔은 정말 살림이라도 차린 기분이다. 여자친구도 한 번 사귀어 본 적이 없는데 같은 남자랑 오 년째 같이 자고 먹고 수련하고 있다니, 젠장. 이브가 검을 내려놓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세상은 믿을 수 없도록 평화로워서 가끔은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늘을 보니 파랬다. 이브는 그 하늘을 하루 종일 쳐다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산에만 틀어박혀 칼질이나 하나 보니 뒷산에서 장작을 패도 재밌었다. 아무렴 이현 얼굴만 안 보면 거기가 천국이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현이 아무리 지겨워도 밥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브가 바닥에서 일어나 이현을 봤다. 그 순간 빈혈이라도 온 것처럼 세상이 새까매졌다.
어. 저 멀리 이현이 점처럼 보였다. 왠지 그 모습이 어색했다.
이브는 상 차리는 이현을 보곤 기묘한 괴리감을 느꼈다. 마치 매일 하던 루틴에 변화가 생긴 것처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 몸을 덮쳤다. 이브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일어나서부터의 행동을 천천히 되짚었다. 그럼에도 다만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이현을 봤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훑어봤다. 이 소름 돋는 감각은 도대체 뭐야. 이현의 눈이 이브를 직시하고 있었다. 눈이, 빛난다. 이현의 눈이. 이현이 두 눈이 전부 있었다. 그래, 분명 이상했다.
이브가 뒷걸음질쳤다. 이현은 이브 상태가 엉망인 걸 보고 이브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브는 멀쩡하게 걷고 있는 이현이 퍽이나 무서웠다. 이현이 왼쪽 다리를 절지 앉는다. 이현의 얼굴이 창백하지 않다. 그리고 이브는 이것이 꿈 속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이브!
제 이름을 부르는 이현의 모습에 핏물 덮어쓰고 제 이름을 부르던 또다른 이현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현은 기어코 산까지 올라온 숙주들을 부러진 목검으로 상대하고 있었다. 이현은 도저히 사람같지 않은 몸으로 움직인다. 휘두르는 검은 숙주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현은 단신으로 그 모든 숙주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현은 이브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친다. 그럴 수 없었다. 스승에게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건 제자가 아니다. 목검은 단 한 개 뿐이었으므로 이브는 무기 하나 없이 숙주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건 이브의 마지막 실수였다.
숙주가 이브에게 달려든다. 이브는 이현이 숙주를 혼자 백 마리도 넘게 상대하고 있어서 숙주들이 이렇게까지 강한 줄 몰랐다. 고작 세 명의 숙주가 이브를 둘러싸고, 이브는 패닉에 빠져 속수무책으로 도망치기만 하다가 결국 그들에게 물리기 직전, 누군가의 그림자가 제 햇빛을 막아준 사실을 깨닫고 슬그머니 돌아섰다.
이현의 어깨가 숙주에게 물려 있었다.
- 그러게 내가 도망치랬잖아.
젠장, 젠장! 이곳은 이미 글렀다. 숙주에게 점령될 것이다. 이현도 물린 이상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브가 서둘러 이현을 등에 업었다. 맨날 명상만 하더니 근육 하나 없이 말라빠져가지곤 어떻게 그렇게까지 초자연적인 힘을 낼 수 있었던 건지. 그간 정말 강해져서 어쩌면 이현을 상대로도 해볼 만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 큰 오산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브의 등판이 이현의 피로 물들고 있었다.
숙주는 여전히 이브를 쫓는다. 이브는 이현만큼 빠르지도 않고 이현이 아무리 가벼운들 남자 성인 한 명 들고 전속력으로 산 오를 만큼 체력이 좋지도 않았다.
- 죄송해요. 스승님. 여기가 저희 무덤인가 봅니다.
- 누구 마음대로.
- 숙주가 쫓아오고 있어요.
이현은 또 명상이라도 하는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 넌 재능이 있다, 이브.
- 갑자기요?
- 언젠가 날 뛰어넘을지도 모르지.
설마. 설마. 진짜 지랄. 안 돼.
- 그 때가 되면 날 잊어라.
그리고 이현은 이브를 등을 박차고 일어났다. 이현이 기절시킨 건지 그 뒤의 기억은 없다. 나중에 해가 뜨고 나서야 달려갔는데 원래 집이 있던 자리에는 숯밖에 없고 다 망가져가는 이현이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그 이후로 이브는 잠만 잤다.
계속 잠만 잤다.
산에 올라온 이후로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 자 본 적이 없는데도 눈 감으면 하루가 지나 있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지독하게 행복한 꿈이었다.
일어나니 또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고, 눈은 미칠 듯이 건조한데, 유일하게 꿈 속과 같은 것이 있었으니 하늘이었다. 이브는 이현처럼 바닥에 드러누워 파란 하늘 위로 이현을 그렸다. 그제야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늘에 맺힌 이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는 이브를 바라본다.
이브.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은 명상할 때 어떻게 잠을 이겨내셨던 겁니까?
자고 싶지 않습니다. 제 꿈에서는 항상 스승님이 나오는데 어째 깨고 나면 고문이라도 받는 것처럼 괴롭습니다.
근데 기묘하게도
그 꿈 속에 있는 당시에는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한 거 아니겠습니까.
제 꿈에서는 무너진 모든 게 돌아옵니다.
스승님,
영원히 꿈에서 깨지 않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W. 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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