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보이지 않는 겨울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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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4 00:09조회 37댓글 0닉네임
코 끝이 시리다. 그 시림으로서 겨울이 왔음을 체감하고, 소복한 눈을 밟자니 한파임을 느낀다. 보이지 않는 곳을 미처 보지 못한다 해도 나는 알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봄은 콧물이 주르륵, 흐르는 느낌과 벛꽃 내음으로 알아맞힐 수 있는 법. 몸이 지옥 같이 뜨겁게 달궈지면 그것이 여름이오, 발치에 바스락한 낙엽이 밟힌다면 가을이다. 겨울은 발 밑으로 으스러지듯 깔리는 눈뭉치들이 발가락과 세포들을 향해 달려가는 편.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달려가는 일이라면 그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다. 안 그래도 떠지지 않는 눈과 시야를 억지로 벌린다면 안구가 뽑힐 정도로 고통에 절 테니. 나의 겨울은 미처 아직 끝내지 못한 계절의 잔해에 머무른다. 학교의 끝맺음도 채 짓지 못한 채 쫓기듯 전학 온 이번 학교도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하다.


- 이 서늘함이 대체 겨울 탓인가, 긴장 탓인가...


반쯤 고민하다 이젠 전부 치워버리기로 다짐했다. 계절을 향한 감정과 미학, 그리고 잔여물까지 모두 뇌 속에서 추방하고픈 맘이 굴뚝 같다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아픔을 느낀다.


어쩌면 더욱 아픔을 느끼는 쪽은 난가. 겨울만 되면 추위를 핑계로 연인의 손과 품에 매달려 호호 입김을 부는 모습도 변변찮다. 이리 생각하면서도 내심 그들을 부러워 하는 것조차도 나란 사실에 깊은 혐오감이 몰려온다.


- 안녕, 나는 고세현이고 대한 고등학교에서 전학을, ...


- 자기소개는 생략하고 어서 가서 앉아라.


또 말이 끊겨버렸다. 이젠 이런 상황 따위 익숙하다 전두엽에서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돌렸건만 실제로 겪는 경험은 어째 또 다른 것일까. 머쓱함에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천천히 손을, 발을 앞으로 내밀어 휘적였다.


- 세현이는 시각 장애인이니까 서로서로 돕고 챙겨주고.


결국 반장이라는 친구에 의해 겨우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패딩의 안면에 남은 온기가 당황에 지친 몸을 데우는 듯한 착각에 마치 위로받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망상에, 착각이겠다만 친구와 얼굴 하나 알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듬어 주는 것은 오직 패딩의 온기 하나뿐.


- 아악, 녕.


오른 귓가에 들려져 전해진 괴상한 말투와 음색. 차피 고갤 돌려도 신원을 알 수 없으니 고개는 여전히 책상 바닥에 고정한 채 말을 잇는다.


- 응, 안녕.


분명 반문했건만 들리는 목소리 하나 없다. 무언가 이상함에 오른팔을 뻗어 방향을 향해 휘적거린다. 물컹하지만 속에 단단함이 차 있는 근육. 분명 사람의 팔이다.


- 흐악, 응!


소란스런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쾅, 뒤로 넘어갔다. 주위가 순식간에 사람 하나 죽은 것인 냥 싹, 고요해진다. 당황에 몸이 더 데워진 탓에 패딩이 훨씬 격하게 위로를 내뱉는다.


- 씨발, 장애인 두 명이서 염병을 한다.


그제야 깨달았다. 반의 분위기, 아이들 모두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이유,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이 친구는 청각 장애인이구나. 그제야 부서졌던 모든 조각이 큐브 맞추듯 전부 머릿속에서 조립된다.


- 미, 미안...


창피함에 금새 엎드려 잠 청하는 척을 해보았지만 전날 새 학교에 대해 과도하게 기대했던 탓일까 결국 정신은 맑은 채 신체만 피로한 격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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