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쳐도 기다림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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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8 17:57조회 31댓글 2ye0r1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우산을 들고 나갔다.

그가 매일 아침 8시 15분, 3번 출구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건 세 번째였다.
회색 수트에 잘 다려진 셔츠, 검은색 우산. 그리고 사람들 틈에서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는 시선.

지하철 계단을 오르던 나는, 또 멈췄다. 이상했다.
비가 오지 않는 데도 그는 매일 우산을 펴고 서 있었다.

- 혹시 ···. 기다리는 사람 있으세요?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잠시 당황한 듯 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 네. 비가 올 때만 오는 사람이에요.

나는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 뒤로 우리는 몇 마디씩 대화를 나눴다.
이상하게, 대화는 짧았지만 긴 여운을 남겼다.

그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런 말을 했다.

- 사람은 비 오는 날 가장 정직해져요. 어딘가 젖는 걸 각오하니까요.

나는 그 말이 좋았다. 마치, 자신도 무언가에 젖어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

그리고 8월 어느 날, 장마가 시작됐다.

폭우가 쏟아지던 그 아침, 나는 일부러 3번 출구를 택했다.
그가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날 그는 없었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주도.

결국 장마가 끝나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나는 그가 남긴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
익숙한 자리에 접힌 우산 하나가 기대어 있었다.
검은색, 튼튼하고 오래돼 보이는 우산.

손잡이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비가 그쳐도, 기다림은 계속된다.

나는 조용히 우산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그날 이후로 나도 비가 오지 않아도 우산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혹시, 누군가 나처럼 젖은 마음을 감싸 안고 있을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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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리이자 솔쵸얀 ( ye0r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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