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피데스.”
그녀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그녀만을 눈부시게 빛추는 조명들 앞에서, 그 커다란 무대 위에서! 그녀는 눈물을 훔치고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이 시대 최고의 가수, 그녀는 왜 무대에서 눈물을 흘리는가. 이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좀 더 멀리, 그녀의 과거로 가야한다.
___
“릴리트님은 왜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를 부르면 즐거우니까.”
“저도 릴리트님의 노래를 들으면 즐거워요···.”
나붓거리며 흔들리는 나뭇잎에 이끌려 도착한 기억의 조각들은 이내 피데스의 심장 깊은 곳에 닿았다. 닿은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져 릴리트를 이루었다. 둘은 그렇게 작은 퍼즐조각들로 이어져있다.
♪
“무슨 노래예요?”
♪
노래를 흥얼거리는데에 열중한 채 피데스의 말을 듣지 못한 릴리트는 또 같은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를때마다 보이는 릴리트의 미소는 언제나 아름답다. 그 미소를 보기 위해 피데스는 오늘도 꽃집의 문을 조금 늦게 열었다. 마을에 있는 꽃집이라곤 피데스의 가게뿐이라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곤 했다. 고로 사람이 아무도 없을때만 들려오는 릴리트의 노랫소리를 길게 듣기 위해선 꽃집을 조금 더 늦게 여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 낡아버린 꽃집. 연두색이였던 피데스의 꽃집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는 간판은 노란색을 띄고 있었다. 꽃집 주변엔 아무데나 핀 꽃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꽃들을 피데스는 함부로 꺾을 수 없었다. 고로 꽃들은 더 자라난다. 피데스는 그 꽃들을 애써 무시했다.
“끝났는데.”
“아, 그렇네요. 그럼, 가시는거죠?”
“으응.”
짧은 대화가 막을 내리고 릴리트가 꽃집에서 나왔다. 딸랑이는 종소리가 희미해지다보면 릴리트의 뒷모습도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피데스와 릴리트의 관계처럼, 금세 희미해지고마는 종소리에 피데스는 괜시리 씁쓸함을 느꼈다. 언제나 평일 아침이면 꽃집에 찾아와 소소한 안부를 묻고는 똑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릴리트와, 그 노래를 들으며 장사 준비를 시작하는 피데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어이, 피데스.”
“···아! 네, 어서오세요···.”
그리고 그 언젠간 끊어질 위태로운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건 언제나 피데스였다. 항상 릴리트를 생각하는 것도, 가게가 한가할때면 릴리트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모두··· 피데스였다.
___
어느 날은 릴리트가 먼저 말을 건내왔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였으나 그 사실이 피데스에게는 왜인지 크게 다가왔다.
“피데스는 왜 꽃집에서 일 해?”
“가업을 이어야 하니까요.”
“꽃집 일, 좋아해?”
피데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릴리트가 꽃집 일이 아닌 꽃을 좋아하느냐 물었다면 고민할 이유도 없이 피데스는 당연히 예를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꽃집 일을 좋아하냐니, 처음 들어본 질문이였다. 항상 꽃을 좋아하냐 묻던 주변인의 질문들에 익숙해져버린건지, 꽃집 일이라···. 예라고 하기에도, 아니오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꽃은 좋아하지만 꽃집 일은 좋아하지 않았다. 릴리트가 모순이라 느끼지 않을까? 그러나 하나 확실한건 피데스가 꽃집 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그럼에도 장사를 접지 않는 이유는 알 수 없는 책임감과 릴리트였다.
“그렇게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
끝내 피데스가 대답했을 땐 이미 릴리트가 노래를 시작한 뒤였다. 늦어도 한참 늦은 대답이였다. 피데스는 한숨을 푹 쉬고는 꽃들을 정리했다. 향기로운 꽃내음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피데스는 릴리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피데스의 대답을 듣지 못한채 편하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까, 아니면 피데스의 대답을 한심하게 여기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언뜻 보인 그녀의 표정은 왜인지 편안해보일 정도로 온화했다. 아니, 약간··· 웃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솔직한 모습이 보기 좋아.”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릴리트의 말을 피데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피데스가 이해하게 된 건··· 아마 몇 년 뒤의 미래. 그 전의 피데스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___
똑같은 아침이 시작됐다. 똑같은 시간에 릴리트가··· 릴리트가···? 릴리트가 오지 않았다. 피데스는 어렵게 침을 꿀떡 삼키고는 못 믿겠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이럴수가. 릴리트가 안올리가 없잖아···. 릴리트는, 릴리트는···.
“피데스?”
릴리트는!
“릴리트님···.”
“오늘 좀 늦었어. 미안해.”
아, 다행이에요. —하고 말하려던 피데스는 자신이 릴리트를 사랑하게 됐다는걸 들통나기라도 할까 아무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릴리트는 자연스럽게 피데스의 맘 속에 스며들어 없으면 안되는 존재가 되었으나 릴리트에게 이곳은 금방 떠날 수 있는 곳이였다. 그렇기에 피데스는 날이 갈수록 매일이 불안해졌다. 그리고 매일 밤이 되면 언젠가 릴리트가 떠나는 날이 왔을 때 조금 덜 아파할 수 있도록 마음정리를 할 뿐이었다.
릴리트는 잠깐 목을 가다듬더니 이내 노래를 시작했다. 여태 노래라기보단 흥얼거림에 가까웠으나 이번은 확실히··· 그녀의 음악이였다. 그리고 여태 부르던 것들과는 조금 다른 멜로디의 노래였다. 명랑하면서도 감성적인 것이 피데스의 마음에 쏙 드는 노래였다. 꽃을 보면서도 피데스는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할 얘기 없어?”
“오늘은 다른 노래네요. 예쁜 노래였어요.”
“내가 만든거야. 그간 불렀던 건 울 엄마가 나한테 불러주곤 했던거.”
“모녀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군요.”
릴리트는 피식 웃으며 다시 나갈 채비를 했다. 무언가 말하려다 마는 눈치의 릴리트를 보며, 피데스는 잠깐 의아해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피데스는 문뜩 꽃집 밖에서의 릴리트가 궁금해졌다. 물어보려했지만 이미 릴리트는 문을 열고 있었고,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리려는 순간···.
“릴리트님!”
릴리트는 대답 대신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피데스는 심호흡을 했다. 여태까지 쭉 해보고 싶었던 말. 릴리트와 꼭 하고싶었던 것.
“이번 주 주말··· 시간 괜찮으신가요?”
“주말이라면 시간 있어. ···왜?”
“여태 깊은 이야기라곤 한 번도 못했으니··· 릴리트님과 담소를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 저기 맛있는 커피집도 제가 알고, 또···.”
푸흐흐···. 그녀의 웃음이 순간 꽃집을 가득 채우며 피데스의 말을 끊었다.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피데스를 보며 릴리트가 웃었다. 노래 부를 때 말고 이렇게 웃는 릴리트를 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예쁘게 웃는 정면의 릴리트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토요일 오전 7시에 여기서 기다릴게.”
피데스가 벙쪄있는 사이, 그녀의 말에 대답도 하기 전 릴리트는 이미 손을 흔들곤 꽃집 밖으로 사라져있는 뒤였다. 피데스는 여전히 자신의 시야에 남아있는 릴리트의 잔상을 상기시키며 다시 꽃을 정리하곤 꽃다발을 엮기 시작했다. 이 꽃다발이 꽃집 손님들이 아닌 릴리트에게 가는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예쁜 꽃들을 골라 엮었다.
___
토요일 오전 7시였다. 6시반부터 가게 앞에 나와있던 피데스는 딱딱딱, 다리를 떨었다. 그녀를 만날 생각에 어젯밤부터 찾아온 긴장 때문일까, 그녀가 혹시라도 오지 않을까 하는 불필요한 걱정 때문일까. 전자든 후자든 피데스가 미치도록 떨고 있다는 것 하나쯤은 사실이였다.
“···피데스?”
저 멀리서 릴리트의 형체가 보였다. 평소보다 훨씬 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릴리트는 씩 웃으며 피데스에게 다가왔다. 피데스는 꿈인가 싶어 시계를 쳐다봤다. 6시··· 38분. 어쩌면 그녀도 오늘 만날 생각에 떨려 밤을 지샜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피데스는 벌써 들떠버렸다.
“어디라고?”
“네?”
“···커피 맛있는 곳 안다며.”
“아, 네!”
사실 피데스는 그 이후로 그녀와 보냈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마지막 나눈 대화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일까, 아님 모든게 순탄하게 돌아가지 않아서일까. 커피를 마시며 나눈 담소는 아주 시답잖은 것이였고, 이후 보러간 영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 릴리트가 있었기에 다행이였지, 만일 그녀가 없었다면 피데스는 영화관에 드러누워서 잘뻔했다. 사람이 없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돈낭비였다.
“있지, 피데스.”
“네.”
“나 이 곳을 떠나서, 좀 더 먼 곳으로 가게 됐어. 그 곳에서 노래를 부를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릴리트가 뱉은 말은 피데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셈이였다. 좀 더 먼 곳. 그 곳이 어디길래 그렇게 매정하게 표현하는건지. 그렇게 먼 곳이라면 아마 도시일터였다. 도시에 가서 릴리트가 부르는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릴리트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였다. 그런데··· 피데스는 왜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없었을까.
“왜요?”
“···왜냐니? 이건 엄청난 기회야. 난··· 난, 가수가 되고 싶어.”
“왜 가야해요? 그냥, 그냥 계속 여기서··· 여기서 노래해주시면 안돼요? 저는, 릴리트님이 없으면···.”
“미안해.”
그 날 이후로 피데스는 릴리트를 볼 수 없었다. 피데스가 기억하는 한, 릴리트의 마지막 모습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눈물을 떨구던 장면에 있었다. 그리고 이내 뒤돌아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___
그렇게 약 몇년이 지났을까, 라디오를 틀면 이제 간간히 그녀의 소식이 들린다. 그녀가 무대에 선다는 이야기, 올해의 아티스트로 선정됐다는 이야기···.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던 가수가 된건지 피데스는 알길이 없었다. 단지 꽃집을 열때면 라디오를 틀어두고,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길 매일을 바랄 뿐이다.
“친애하는 피데스.”
지직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들린 익숙한 목소리는 항상 희미하게 들려오던 라디오 음성 중 가장 명확했다. 그건 분명 릴리트의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가 말한 것은 피데스의 이름이였다.
“당신 덕분에 내가 노래를 하게 됐어. ···시간 날 때 도시로 와. 오랜만에 할 이야기들이 많아.”
뚝, 하고 끊기는 소리와 함께 릴리트의 음성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도시로 오라고? 천만에, 피데스는 당장이라도 도시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왜 가지 않았느냐하면, 릴리트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이제서야 피데스 자신을 부른 릴리트가. 이럴거면 차라리 평생을 잊어버리지. 피데스는 여전히 자신을 기억해준 릴리트가 고마우면서도 참 미웠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그 날은 꽃집 문을 닫지 않았다. 릴리트 생각에 잠겨 밤을 지새웠다.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보다보면 릴리트와 보냈던 그 날 데이트가 떠올라 피데스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___
딸랑—
“어서오세요.”
“···여기있었구나.”
“···.”
릴리트가 피데스의 이름을 불렀던 그 날로부터 일주일쯤 지났을까. 꽃집에 찾아온 건 다름아닌 릴리트였다. 릴리트임이 틀림없었다. 릴리트는 피데스 앞에 서서는 웃으며 말했다.
“알스트로메니아. 있어?”
“그럼요.”
피데스는 릴리트의 새출발을 언제나 응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릴리트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피데스는 언제나 릴리트의 노래를 상기시켰다. 그런 피데스와 마찬가지로 릴리트 또한 피데스를 위한 노래를 썼다. 그 선율은 참으로 부드럽고, 또 다정한 것이··· 꽃집을 가득 채운 꽃향기와도 비슷했다.
♪
라디오에서 몇 번 들어봤던 노래였다. 릴리트는 항상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고마운 사람이 있다고 소개하곤 했다. 그 고마운 사람이 피데스였단 걸 누가 알았을까. 노래가 막을 내리고 릴리트가 한 말은,
“이번 주 주말, 시간 괜찮아?”
“주말이라면 괜찮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할 이야기가 있어.”
“토요일 7시에 만나요. 기다리겠습니다.”
둘의 웃음소리가 꽃집 안에 번졌다.
___
W. 유하계
https://curious.quizby.me/Yusu…아니 오천자?썻는데 진짜레전드로맘에안들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