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해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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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1 15:09조회 104댓글 0812 55120 88121
나는 이 해를 버스에 두고 내렸다.

연말이라고 해서 거리가 특별히 더 밝지는 않았다.
가로등은 늘 차가웠고, 편의점 불빛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캐럴도 들리지 않았으며 늦은 시간이라 구세군 분들도의 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등을 떠미는 것처럼.

나는 정류장에 서서 막차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너무 늦고, 애매한 시간. 그 애매함이 오늘은 마음에 들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한 해의 마지막이라는 말에 비해 너무 조용한 순간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교통카드를 찍고 맨 뒤쪽 창가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의 풍경이 느리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가게 앞에 쌓인 박스들, 전구가 다 꺼진 크리스마스 트리와 닫힌 셔터, 불이 켜진 몇몇 창문들. 모두 올해의 마지막 밤을 각자의 방식으로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올해를 떠올려봤다.

사실 떠올리고 싶어서는 아니고, 떠오르지 말라고 애써도 자꾸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했던 문장들.
괜히 예민해져서 상처 줬던 말.
혼자 방 안에서 이유 없이 울었던 밤.
잘못한 것과 잘하지 못한 것들이 뒤섞여, 정리되지 않은 채로 마음에 남아 있었다.

벌컹-

그 때 버스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한 약속 하나를 나 혼자 만들었다.

이 버스 안에서는, 붙잡지 말자. 어떤 일이 있어도.

지나간 일은 생각해도 괜찮지만, 손에 쥐지는 말자.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을 붙잡지 않듯이, 지난 열두 달의 나를 잠시 바라보기만 하기로 했다.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는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고, 몇 자리 앞 누군가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이 버스 안에는 각자의 연말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생각보다 차분해 보였다.
울고 있지도, 웃고 있지도 않은 얼굴.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네.'

버스는 익숙한 길을 지나 낯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평소라면 내렸을 정류장들이 하나둘 스쳐 갔다.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도 괜찮았다. 오늘은 도착지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23시 59분.

나는 괜히 숨을 고르고, 창밖을 더 오래 바라봤다. 올해의 마지막 분이 이렇게 조용하게 지나갈 줄은 몰랐다. 누군가는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을 테고, 누군가는 폭죽을 터뜨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버스 안에는 그런 소리가 없었다.

00시 00분.

휴대폰 화면의 숫자가 바뀌는 순간, 버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달렸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동시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버스 안내 방송이 울렸다.
"다음 정류장은-"

나는 그 이름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획에 없던 정류장이었지만, 지금은 그곳이 딱 맞는 곳처럼 느껴졌다.

'아, 춥다.'
버스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한 발 내딛고, 잠시 뒤를 돌아봤다. 버스 안은 여전히 조용했고, 내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된 것처럼 낯설어 보였다.

문이 닫히고, 버스는 천천히 출발했다.

나는 그대로 정류장에 서서 버스가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 빨간 불빛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지난 1년을 저 버스에 두고 내렸다는 걸.

모든 후회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모든 상처가 치유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 그것들을 꼭 쥐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목도리를 조금 더 여미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발밑에서 눈이 살짝 밟히는 소리가 났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혼자였지만, 이상하게도 충분했다.

2025년은 그렇게, 막차를 타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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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벌써 2026년입니다. 2025년, 올해 어떻게 보내셨나요? 지난 1년간 모든 날이 웃음으로 가득할 순 없었겠죠. 행복했던만큼 슬픈 날이 있으셨을텐데, 여기 주인공처럼, (버스가 아닌 제 글에) 미련 없이 다 떠나보내시고 같이 반갑게 2026년을 맞이해봅시다. 남은 2025년 후회없이 재밌게 보내시고 더욱 더 성장한 채로 2026년에 만납시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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