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지 못하는 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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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6 16:31조회 59댓글 11u1
너에게 나는 한 계절도 되지 못한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어깨에 닿지도 않던 짧은 머리가 바람에 쉽게 흩날리던 시절에서, 어느새 바람을 타고 흘러갈 만큼 길어졌을 때까지. 긴 머리를 좋아하던 너는 가끔 내 머리를 좋아했고, 나는 네가 좋아하던 모습으로 조금씩 나를 바꾸곤 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사소한 변화들마저 네가 불현듯 떠오르게 하는 핑계가 되어 다시 너를 써봤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다시 만난 것처럼, 모든 것이 한 번 더 여름이 된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함께 지새웠던 여름밤의 짙은 공기마저 너를 닮아 있어, 숨을 쉬는 일조차 너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을 좋아하지 않던 우리가, 여름을 닮은 너 때문에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여름은 어느새 내 청춘의 일부가 되었다.

요즘은 너를 떠올리는 시간이 확실히 줄었다. 그래도 매일 새벽녘이면 어김없이 네가 보고싶기 마련이였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이 많았던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가끔은 나조차도 궁금해졌다. 네 웃는 얼굴을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보고 싶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부디 나를 기억이 아닌 추억으로 남겨주길 바랬다. 닿을 수도, 이룰 수도 없는 마음인 걸 알면서도, 날 보고 싶어하지 않아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를 그저 기억이 아닌 추억으로 생각해주었음 좋겠다. 닿을수도 이룰수도 없는 바램인걸 알지만 그래도 소망해보기를. 날이 추워지면 따뜻하게 입고, 끼니를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기를. 언젠가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네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네 걱정을 하며 하루를 살아가게 될 날이 오겠지만.

너에게 나는 한 계절도 되지 못한 사람이었을지라도, 가끔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너를 떠올릴 수 있기를. 아무렇지 않게, 아무 상처 없이, 안부를 묻는 날이 오기를. 그저 그 정도의 마음으로, 너를 놓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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