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未知) (판타지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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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4 12:22조회 68댓글 4한지우
미지(未知)
-By 한지우

혜원은 고성 지하 깊숙이 감춰진 서고로 발을 들였다.
칙칙한 촛불이 은은한 음울을 드리웠고, 거대한 서가 사이로 난 미로 같은 통로가 그녀의 시각을 교란했다.
먼지와 진동이 뒤섞인 공기는 마치 시간을 봉인한 듯
정체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문서와 단편화된 필사본에서 방대한 어휘의 잔재를 수집하는 성수자였다.
그 순간, 희미한 속삭임이 복도를 타고 흘렀다.
잉크의 변질로 빛이 바랜 페이지 위 문양이
율동하듯 기만적인 환영을 만들어냈다.
혜원은 호흡을 가다듬고, 지팡이를 책장 틈새의 결절(結節)에 꽂아 고정한 뒤 사색에 잠겼다.
그녀와 서고 사이에 무형의 언약이 체결된 것이다.
시간의 베일이 살짝 걷히자, 서고 한구석에서 돌연 거대한 석판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는 현세와 망각의 심연을 잇는 경계 문서가 잠들어 있었다. 경계를 넘는 순간, 혜원의 의식은 현기증과 황홀함의 교차로 진입했다.
그곳에서만 존재하는 미지(未知)의 어휘들이
그녀를 유혹했다.
문서를 펼친 혜원은 손끝에 전해지는 이질적인 파동에 몸을 맡겼다. 육체는 이윽고 잊힌 언어의 화신과 동화되었고, 그녀는 서고에 영원히 속박된 채 무수한 단어의 유의례가 되었다. 남은 것은 촛불이 쓰러진 뒤에도 새겨진, 희미하고도 찬연한 어휘의 잔영 뿐이었다.

-By 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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