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천리향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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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2 23:00조회 46댓글 1빙화
BL / 종교 소재 주의


엔하이픈(ENHYPEN) - Given-Ta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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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 존재하는 곳이 꿈속이라면
꿈 속 세상이 사실 현실이라면
천사들의 함정에 빠져 꿈 속 세상에 갇힌 거라면
당신은 악마의 손을 잡고 물을 헤쳐나갈 수 있는가?








1

햇살이 눈앞을 간지럽혀 잠에서 깼다. 침대 옆 화분에는 천리향 몇 송이가 꽂혀있었다. 내가 저 꽃을 샀었나, 몽롱한 기운에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온통 흰색으로 이루어진 원룸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 해가 들어왔던 높고 작은 창문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오른쪽 어깨까지 내려온 옷을 바로 입곤 일어난 그때, 발 앞으로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또 천리향. 왜 이렇게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꿈 따윈 다시 꾸고 싶지 않은데.










2

무릎까지 오는 물을 헤집으며 걸었다. 아무도 없는, 오직 나만 거니는 곳. 이 교회는 어딜 가던 순백이다. 일말의 흑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치형 천장에 보이는 흰색 십자가. 예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 교회를 내가 가꾸어야 한다는 건 알았다.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물이 반사되어 영롱한 빛을 내었다.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이곳. 곳곳엔 정체 모를 흰색 꽃이 장식하고 있다. 향기는 끝내주게 좋은데, 이름만 알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나풀거리는 흰색 상의와 딱 달라붙는 흰색 스타킹. 목엔 검은 띠가 둘려 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검은 것. 그것이 나를 구속하고 있다. 마음대로 풀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 이 교회에 갇혀 지내서 그런가, 성경 하나 없어도 신이 뇌리에 새겨졌다. 그렇게 살다 보니 천사에게 달려있다던 날개도 생겼다. 겁이 나 사용하진 못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난 천사가 아닌데. 이 날개는 내 것이 아니다.





3

어김없이 교회를 거닐며 정리정돈 하고 있었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을 해보기도 했었다. 가끔 햇살 아래에서 쉬기도 하고, 예베장에서 기도하는 흉내도 내보고, 물을 거스르며 첨벙거려도 잠시일 뿐, 다시 고요하게 돌아왔다. 해님의 밤낮 구분도, 시계도 없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이곳에선 그저 가꾸는 것밖엔 할 일이 없었다.

유리병에 차곡차곡 꽃을 모으던 중, 물에 발이 헛디뎌 넘어졌다. 유리가 의자에 부딪혀 쨍그랑 소릴 내며 흩어졌다. 이곳에 온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놀라 가만히 있는 것도 잠시, 조각들을 치워야 했기에 조심스레 하나씩 집어들었다. 조심한다 해도 유리는 유리, 오른쪽 검지가 배어 들고 있던 유리들도 다 놓쳤다. 피는 금세 맺혀 물 위로 떨어졌다. 붉은색이 물 위로 퍼져 나가다, 영롱한 물에 삼켜져 피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파?"
"..?"

들려온 낯선 소리에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높은 창틀에 사람 형상이 앉아있었다. 수십 번 이곳을 돌아다녀도 머리카락 하나 볼 수 없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본 사람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의 머리엔 검고 붉은 뿔 한 쌍이 달려있었고, 몸엔 드래곤의 것을 닮은 날개와 끝이 하트 모양인 꼬리가 있었다. 전형적인 악마의 형상. 하지만 얼굴은 눈에 띄게 잘생겼다. 저를 바라보던 세모 입이 다시 움직였다.



"아프지 않아? 유리에 베였잖아."

얼마나 여기 있었던 거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혼자 이 교회를 방황하는 동안은 말이 필요 없었으니까, 퇴화한 건가. 콜록, 켁. 몇 번 기침을 하니 입에서 흰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금세 또 물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남자는 놀라 창틀에서 내려와 등을 쳐주었다. 숨을 크게 쉬었다.



"와.. 진짜 내가 더 늦게 왔으면 돌이킬 수 없었어 너."
"...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있어.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있잖아? 안 알려줄 거야."
"근데 당신은 갑자기 왜 나타난 거죠?"
"너가 날 불렀잖아."

불러요? 제가요? 언제..? 피. 너 피 흘렸잖아. 이 남자는 진짜 악마인 걸까? 사실 이것 말고도 물어보고 싶은 게 더 많았다. 여긴 대체 어디고, 나는 왜 갇힌 거고, 나는 무슨 존재였는지.. 하지만 남자가 한 말이 있었기에 일단 보류. 남자는 어느새 물 위에 흩어진 유리들을 줍고 있었다.



"나는 너가 날 불러야 올 수 있었어. 아 그렇다고 너 다치게 하지 말고, 내가 원할 때 올게. 알았지? 일단 이 유리는 내가 치운다."
"..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음, 그냥 악마라고 불러. 내가 악마 같이 생겼잖아."
"네 악마님."
"굳이 존대를 써야 해? 너 편한 대로 해."

존댓말이 편해서요. 그럼 그렇게 해. 악마는 유리를 다 줍고 한 손에 쥐었다. 어느새 유리는 유리병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악마가 웃으며 병을 건네자 나는 떨떠름하게 받았다. 악마가 이런 걸 할 줄은 몰랐지? ..네. 감사해요. 앞으론 조심해. 말 하나 남기고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지. 헛것을 본 건가.





4

"제대로 자본지는 얼마나 됐어?"
"음.. 기억도 안 나는데.. 요..."
"심각하네. 이리로 와봐."

헛것이 아니었다. 악마는 나를 자주 찾아와 말을 걸었다. 지금은 나를 제 무릎에 뉘이곤 눈을 감겼다. 이제 잠 좀 자. 잠이 안 와요. 그래도 자야 해 넌, 눈이라도 감고 있어봐. 악마는 손에 무슨 주문이라도 걸었는지 금세 잠이 왔다. 이곳에 갇힌 뒤로 졸음이란 걸 못 느꼈었다. 나를 재우는 악마가 내심 고마웠다.

꿈에선 넓은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놀랍도록 제 주위엔 아무도 있지 않았다. 그저 한두 칸 떨어진 자리에서 나를 보며 수군대었다. 나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애썼지만,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난 뒤, 몇몇 동기들이 나를 이끌어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여러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지만 희미하게 들렸다. 정신이 어지럽고, 몽롱했다. 한 명이 나를 치자 중심을 못 잡고 넘어졌다. 그 충격으로 잠에서 깨버렸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나를 악마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때? 꿈속은?"
"끔찍해요. 이젠 자고 싶지 않아요."
".. 역시나..."
"네?"
"아냐, 너 땀을 너무 많이 흘렸다. 힘들었겠네."

악마는 물을 내 얼굴에 적셔주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차가웠다. 정신이 이상해서 그런지 아니면 악마가 주문을 걸었는지.. 몸을 다 식히고 나서도 도저히 힘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악마에게 기대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악마는 내 손을 마사지해주었다. 이럼 좀 나아질 거라고. 믿지 않았지만, 어느새 호흡이 진정되어 있었다.





5

그 뒤로도 악마는 몇 번씩이나 꿈을 꾸는 것을 시도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꿈은 매번 다르게 날 옥죄어 왔고, 악마는 항상 미안하다며 안아주었다. 악마의 품이었음에도 숨은 트였고, 심신은 진정되었다.

악마와 같이 있지만 꿈을 꾸지 않을 때에는 어김없이 교회를 거닐었다. 같이 물장난을 치기도 하고, 햇빛을 등지고 그림자놀이를 하기도 하고. 가끔은 성경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다. 악마 주제에 성경은 어떻게 아냐면, 악마의 세계에서 금기된 도서들을 보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여태까지 보아 악마보단 천사에 가깝지 않을까? 악마치곤 너무나도 착한데. 과연 이 남자를 악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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