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25 21:53•조회 28•댓글 0•익자까
책상 위에는 붉은 광택이 번들거리는 작은 버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나치게 단출한 형체였으나, 그 침묵은 기이할 만큼 위압적이었다. 곁에 놓인 카드에는 단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이 버튼을 누르는 즉시, 지구는 멸망합니다.’
순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세계의 종말치고는 지나치게 초라한 외양이었다. 그러나 버튼 옆 전광판의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자, 등골을 타고 한기가 스며들었다. 59, 58, 57.
나는 버튼을 응시한 채 숨을 삼켰다. 이토록 방대한 행성의 존망이 어찌하여 한 사람의 손끝에 달려 있을 수 있는가. 믿기 어려운 부조리였으나, 동시에 잔혹할 만큼 선명한 현실이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풍경들이 명멸했다. 새벽 첫차에 몸을 싣는 노동자의 굳은 어깨, 시험지를 구겨 쥔 학생의 떨리는 손끝, 병실 창가에서 봄빛을 기다리는 환자의 눈동자, 사소한 농담에 터져 나오는 친구들의 웃음. 세계는 비극과 환희, 피로와 사랑, 절망과 염원이 뒤엉킨 거대한 직조물이었다.
물론 세상은 결코 완전무결하지 않았다. 탐욕은 범람했고, 전쟁은 반복되었으며, 무관심은 타인의 고통 위에 무덤덤히 내려앉았다. 때때로 인류는 스스로를 구제 불능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버튼은 차라리 모든 오류를 지워 버릴 냉혹한 결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폐허 속에서도 사람은 꽃을 심고, 상실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는다. 무너진 자리마다 다시 일어서는 존재가 인간이었다. 세계의 가치는 완벽함에 있지 않았다.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집요함에 있었다.
숫자는 마침내 3, 2, 1을 가리켰다. 손끝은 버튼 위에 머물렀다. 나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저녁놀이 도시의 유리창마다 부서지고 있었고,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전선 위에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누군가는 이별을 견디며, 누군가는 여전히 저녁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붉은 버튼 하나가 아니라, 세계를 더 나아질 수 없다고 단정하는 체념과 오만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