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압계가 가리킨 진심
이상현의 비밀을 알게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하늘은 내 속도 모르고 연일 거센 장마를 퍼부어댔고, 뉴스에서는 이번 주말이 이번 장마의 최대 고비가 될 거라는 예보가 흘러나왔다. 이상현의 공책에 적혀 있던 누적 강수량이 머릿속을 맴돌 때마다 나는 숨이 막혀왔다. 그 애의 손목에 새겨진 파란 선이 얼마나 더 차올랐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이상현이 사라지는 걸 볼 수는 없었다. 나는 큰 용기를 내어 금요일 하교 길, 우산 속에서 이상현의 교복 소매를 붙잡았다.
“이상현, 내일 주말인데 나랑 만날래?”
“……비 오는데?”
“응. 비 와도 상관없어. 그냥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이상현은 잠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어두컴컴한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학교 근처의 한 오래되고 한적한 카페에서 만났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따뜻한 음료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빗소리만이 무겁게 흐를 뿐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이상현의 왼쪽 손목으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긴팔 셔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그 파란 선이, 오늘 내리는 이 비로 인해 또 얼마나 차오르고 있을까.
“한시은, 자꾸 그렇게 슬픈 눈으로 보지 마.”
이상현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 아직 안 사라졌어. 여기 있잖아.”
“어떻게 마음이 안 아파? 너는…… 너는 곧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덤덤해? 세상 사람들이 다 널 잊어도 진짜 괜찮다는 거야?”
참아왔던 눈물이 결국 왈칵 고여 들었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상현은 대답 대신 창밖을 보았다. 카페 유리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빗물들이 마치 그 애가 흘리지 못하는 눈물처럼 보였다.
카페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빗줄기는 아까보다 훨씬 더 거세져 있었다. 우산을 쓰고 가는데도 바람이 불어 어깨와 치맛자락이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빗속을 걸었다. 이상현의 우산은 어제처럼 내 쪽으로 깊숙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그 애의 오른쪽 어깨는 이미 진한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동네 놀이터 앞을 지나갈 때쯤, 이상현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이 온통 거친 빗소리로 가득 차 세상에 오직 우리 둘만 남겨진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공간이었다.
“한시은.”
이상현이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자, 그 애가 우산을 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내 우산 손잡이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애의 손가락 끝은 눈물이 날 정도로 서늘하고 투명해 보였다.
“아까 질문에 대답 안 한 거, 지금 하려고.”
“어……?”
“안 괜찮아.”
이상현의 목소리가 빗소리 틈새로 낮게 울렸다.
“처음엔 억울했어. 왜 나만 장마가 끝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지, 왜 내 인생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시한부처럼 끝나야 하는지,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웠어. 어차피 다들 날 잊을 테니까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않으려고 했고, 아무도 내 마음에 들이지 않으려고 벽을 쳤어.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으니까.”
이상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애의 단단해 보였던 벽이 내 앞에서 처음으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근데 한시은, 네가 내 우산 속으로 들어온 날부터 모든 게 다 엉망이 됐어.”
“이상현……”
“미련하게 자꾸 눈에 밟히고, 우산이 없으면서도 일부러 나랑 같이 쓰려고 기다리는 네 모습이 자꾸 생각나더라. 네가 사다 준 초코우유 하나에 가슴이 뛰고, 네가 나를 보며 울어줄 때마다…… 나 진짜 미치도록 살고 싶어졌어. 전학 가는 척 거짓말치고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가기 싫어졌다고.”
이상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애의 하얗다 못해 투명해진 손가락이 내 손을 꽉 쥐어왔다.
“나 너 좋아해, 한시은.”
거센 빗속에서 이상현의 고백이 내 심장에 정통으로 꽂혔다. 소나기처럼 갑작스럽고, 장마처럼 거부할 수 없는 고백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날 잊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무서워. 네가 날 잊어버릴까 봐. 네 기억 속에서조차 내가 지워져 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섭고 두려워.”
이상현의 눈에서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애의 눈물은 내리는 빗물과 섞여 어디론가 흘러갔지만, 내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을 깊은 흉터처럼 새겨졌다.
나는 쥐고 있던 우산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이상현의 품으로 뛰어들어 그 애의 허리를 꽉 안았다. 비에 젖어 서늘한 온기가 느껴졌지만, 그 심장 박동만큼은 누구보다 뜨겁게 뛰고 있었다.
“안 잊어. 절대 안 지워, 이상현.”
내 뺨이 그 애의 젖은 교복 셔츠에 닿았다. 나는 울먹이며 그 애의 등에 손을 더 얹었다.
“세상이 다 널 지워도, 네가 너 자신을 지워버린다고 해도 내가 널 기억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내 마음에 내린 너는 영원히 안 그치니까.”
장대비가 우리 두 사람 머리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우리의 첫 고백은 세상에서 가장 축축하고, 가장 아프고, 가장 눈물겨운 빗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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