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9 20:22•조회 30•댓글 0•hal0
오늘도 여김 없이 날파리 날리는 쓰레기장에 비닐봉지를 쑤셔 넣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은 고작 이것뿐이다. 이 이상의 일은 할 수 없고, 애초에 할 줄도 모른다. 하긴, 평생을 책만 보며 살아온 여자애가 무슨 재주로 도둑질이나 스토킹을 하겠는가. 무법지와는 일면식도 없던 내가 도적소굴의 쩌리가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유라고 봐도 괜찮을지 고민이다. '돈이 많아 보인다'며 도적들에게 납치당했는데,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고. 심지어 난 가정폭력까지 당하고 있었다. 이용하기도, 버리기도 애매한 나의 사정을 딱하게(...) 본 도적소굴의 대장이 나를 도적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 파트레샤, 쓰레기봉투 하나만 더 만들어봐.
— 또 왜? 아까 가져다줬잖아.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나를 납치한 도적들이 무섭기도 해서 큰 반항은 하지 않았지만 도적소굴에서의 일상은 지겹다 못해 썩어 문 들어졌다. 도적들은 도적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소매치기 수준의 저가 물건들만 골라 훔쳐왔으며 소굴에 돌아오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렇게 나온 쓰레기는 덤.
— 잔말 말고 만들기나 해, 쫓겨나기 싫으면.
'쫓겨나기 싫으면' 도적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자신이 불리해질 때면 필살기처럼 사용하는 주 무기랄까. 내가 조금이라도 토를 달고 반항을 하면 습관처럼 말이 튀어나왔다. 기분은 더럽지만 그 이상 토는 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 쫓겨날까 봐.
— 몇 사이즈로?
— 500.
여기서 쫓겨나면 갈 곳도 없을뿐더러, 쫓겨날 때 어디 하나 부러질까 무서웠다. 권선징악이라고 하던가? 언젠가 이 망할 도적들에게 벼락이 떨어지길 바라며 쓰레기봉투를 건넸다.
— ...
아무 말없이 쓰레기봉투를 받아 드는 그 손이 재수 없었다. 고맙다 한 마디 하면 어디 덧나나? 도적들은 여러 일회용 쓰레기와 휴지뭉치들을 쓸어 담아 내게 건넸다.
— 버려.
— ... 에휴.
짧고 얇은 탄식 소리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헛기침을 하며 소굴을 나섰다. 다행히 상황은 모면한 듯 보였으나, 눈치가 보여 안으로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소굴 앞 계단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단지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뿐이었다.
— 으으-.. 슬슬 들어가야지.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을 열려던 순간 내 어깨 위로 손 하나가 올라왔다. 길고 예쁜 손이었다. 하지만 여자의 것은 아닌. 소름이 끼쳐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落花流水 #낙화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