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내리는 날 , /_ 단편 소설 🇰🇷
설정2025-02-27 08:46•조회 40•댓글 7•한소라
서울 탑골공원. 3월 1일.
회색빛 하늘 아래 함박눈이 흩날렸다.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를 여미며 바삐 지나갔다. 그런데 그들 사이, 오래된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 하나. 손에는 하얀 국화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준호, 아흔넷.
그는 매년 이곳을 찾았다. 3월 1일, 정확히 이 시간에.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습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벤치에 앉아 국화를 들고 있는 노인을 본 사람들은 그냥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라며 스쳐 지났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준호의 눈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기억 속의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준호야, 만약 우리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꼭 여기서 다시 만나자. 약속이야."
1919년, 그해 3월 1일.
아홉 살이었던 준호는 부모님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모두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혼란 속에서 일본 군경들이 몰려왔고, 준호의 부모님도 그들에게 붙잡혔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가 준호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엄마, 아빠는 꼭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매년 이곳에서 기다려 줘. 알겠지?"
어린 준호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조국은 독립을 맞이했고, 어린 소년은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매년 3월 1일이면 이곳을 찾았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이제는 너무 지쳐 있었다.
"이제… 정말 혼자 남은 걸까."
준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 순간이었다.
흰눈이 조용히 내려앉는 가운데, 희미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젊고 따뜻한 얼굴, 낡은 한복 차림.
"우리 준호야, 오래 기다렸지?"
준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국화를 꼭 쥐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야… 다시 만나는군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날, 탑골공원에는 오래도록 눈이 내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노인의 평온한 얼굴을 기억할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가 평생을 기다려온 순간이, 바로 그날 이루어졌다는 것을.
< 작가의 한마디 >
2일뒤면 3월1일, 3.1절입니다.
3월 1일.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희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준호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신념이었고, 독립을 꿈꾸던 모든 이들의 바람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말했다고 합니다. "기억하는 한, 그들은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오늘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건, 그날 외쳐진 수많은 ‘대한 독립 만세’ 덕분입니다.
그러니 부디, 잠시만이라도 기억해 주세요.
그날의 용기, 그날의 희망, 그리고 그날의 기다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