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3 17:06•조회 43•댓글 1•한결
아아 그대여, 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기 전에 나를 보러와주세요.
나는 아직 그대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일 밤 그대를 염원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그대에 그 눈빛을, 그 따스한 손길을 한번이라도 더 만질 수 있을까요.
오늘같이 찬 바람이 뇌리를 스치면 어김없이 그대가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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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청춘을 기꺼이 내어준 둘은 청춘이 아깝지 않을 만큼 서로를 연모했고 서로로서 행복했다.
여름이 보고싶다던 그녀를 위해 그대는 마치 봄을 도려낼 정도의 측은함을 안고 있었다.
둘은 모순적이게 가을 있음에도 여름을 좋아했고 가을이 찾아오면 또 항상 두려워했다.
그 둘은 모든것을 알고있었고, 어쩌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대가 언젠가 그녀를 떠난다는 것.
둘은 이 사실을 알고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만남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해어짐이 있다는 것.
그렇지만 둘은 이제 서로의 청춘을 연인을 뛰어넘어 서로가 되었다. 그렇기에 언젠간 찾아올 해어짐이 두렵고 그 사실을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공허했다.
이때까진 찰나의 해어짐이라고 생각했으며, 해어지지 않으면 된다고 서로를 다독였다.
그들이 모든것을 알았더라면 이 다짐이 얼마나 헛된 바람이었는지 알게되겠지.
그대는 그녀에게 항상 부드러운 말을 내뱉고 그녀 역시 그대에게 사랑스러움을 내뱉었다.
그들 사이에 상처 또는 아픔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둘은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가 빠진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둘의 입에서 사랑 같은 말이 나오게 된 것 아닐까.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며 그대는 그녀에게 예전같지 않았다.
그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한다고 내뱉었지만 그에게선 예전같은 부드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태양만을 바라보는 한결같으며 찬란했던 해바라기는 어느새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민, 태양을 바라보지 않은 채 다른 쪽으로 꺾여버린 시든 해바라기가 되었다.
그대는 점점 그녀에게 나태해졌고 무심해졌으며 딱딱해졌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그저 스스로를 끝없이 자책할 뿐 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둘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우 형식적이며 딱딱하고 진부한 대화를.
청춘이 되어준다는 말이 무색하게 여름을 위해 가을도 따다준다는 다짐이 어색하게 그는 변해버렸다.
그녀 역시 그대에게 조금 시들해졌다. 그녀가 이것이 해어짐인가 인지할 때 쯤에.
그대가 사라져버렸다.
어떤 말이나 편지 한장도 없이 그대는 증발하듯 그녀의 곁을 떠났다.
그날은 그들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가을의 시작이었으며 매우 차가운 바람의 날이었다.
그대가 사라진 후 그녀는 천천히 부식되었다.
그대를 향한 그리움으로 시작된 가슴의 옹알이는 어느새 그대를 향한 복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비수 뚫듯 스쳐갔다.
그러나 이 역시 과연 분노가 맞았을까.
그녀는 진심으로 그대를 연모했기에 단순 좌절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대가 사라지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연래없는 병을 선고받아 병원에 입소하였다.
그녀는 많이 초최해졌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대에게 간신히 지탱해 발병하지 않았던 어떤 희귀병이 그녀를 덥쳐왔다.
그대가 사라지고 근 일주일의 시간들은 마치 폭풍우가 휩쓸듯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것도 이제 작년에 이야기이다. 병원에 입소한 후 그녀는 매일밤 그대를 애타게 찾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미친 정신병자가 되어 이곳에 입소했다고 치부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자신은 그대를 잊지 못하여 이런 모양새가 되었다고.
병은 그녀의 몸속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녀는 점점 그대의 모습이 아득해졌고, 말 역시 어눌해졌다.
아니 이건 병의 증새가 아닐지 몰랐다. 그녀에겐 더이상 그대가 없다는 상실감이, 병원 입소자들에 차가운 눈초리가 어쩌면 그녀를 더욱 이렇게 만든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대가 그녀의 곁을 떠난지 일년이 살짝 되지 않았던 어느날 그녀는 차가운 서류에 적힌 시한부를 받게 된다.
그녀는 이제 겨우 한달을 채 넘길 수 없다.
마지막까지도 그대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초점이 보이지 않았다. 윤끼나는 머릿결은 하나 둘 빠져 빈 곳이 조금씩 보였고, 탱글한 스무살의 피부에는 깊은 주름이 박혔다. 그녀는 서서히 망가져갔다.
이때쯤 그녀는 진심으로 그대를 증오했다. 아니 그대를 너무 사랑했던 지난날에 그녀를 증오했다.
그대를 생각하면 치를 떨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 그대를 그리워했다.
살 날이 정말 남아있니 않았던 어느 추운 가을날 그녀는 의문에 한 남자에게서 고이 접힌 빛바랜 쪽지를 받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지루하디 짝이 없는 허망한 눈빛으로 그 쪽지를 열었다.
그리고 그 쪽지에 적힌 발신자의 이름과 날짜를 확인한 후 그녀는 근례에서, 아니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놀란 눈빛을, 모습을 취했다. 그 쪽지에는 그녀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연모하는 당신에게
나의 부제로 적잖은 놀람과 힘듬을 겪었을 것 이라고 생각하오.
며칠 전 예방차례 갔었던 한 병원에서 희귀병을 진단받았소.
나에게 살 날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렇다고 당신에게 차갑게 대한건 미안하오.
당신의 웃음을 본다면 내가 차마 떠날 수 없어서 그리하였소.
난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소이다.
이 편지를 그대가 읽었다면 당신의 지금 상황도 썩 좋지 않을 것 같네.
내가 많이 미안하오.
당신에게 커다란 아픔을 심어준게 아닐까 떠난 그 날 부터 항상 걱정했소.
그러나 나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에 선택이였다고 생각해주오.
몸이 떠나간 후에 당신이 얻는 슬픔이 더 적을 것 같기에.
당신이여 이 미련한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마시게.
너무나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오.
먼 미래에 저 위에서 만납시다 당신.
그곳에서 우리 예전처럼 영원히 사랑합시다.
당신을 죽도록 연모하는 한 그대가.
쪽지를 읽은 그녀에 눈에선 굵은 무언가가 천천히 낙하했다.
그녀는 북받치는 감정을 다 담을 수 없었다.
그대의 모습과 그대의 목소리, 그대를 기다렸던 모든 나날들과 이제야 알게된 그대의 부제에서 나오는 그 모든 감정들이 복합되어 그녀를 흐느끼게 만들었다.
그대에게 있을 사정을 모르고 미워했던 나날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자신을 옥죄었다.
그 때 그녀에 귓가에서 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그 목소리가.
그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괜찮다고, 나는 괜찮다고 다독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지만 그대의 허상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굵은 눈물을 떨어트리며 붉게 충혈된 눈을 천천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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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이제 나도 곧 그대를 보러 가겠습니다.
많이 미워했던 지난날의 날 용서해주세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요 그대.
곧 만나면 그대가 그토록 원했지만 보지 못했던 내 따스한 웃음을 맘껏 지어드릴게요.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제 삶엔 오로지 그대만 가득할 것이에요.
이따 만나요. 많이 사랑해요.
그녀는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었다.
차가운 가을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졌다.
잎사귀가 떨어진 그 곳에는 작은 꽃씨가 땅을 뚫고 나왔다.
마치 지금을 기다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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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만 읽어주세요…
@한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