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Blue & 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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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2 23:40조회 73댓글 7이진
W.이진

*레인버스 세계관을 각색하여 만든 이야기입니다.
*성별은 원하는 대로 상상해 주세요.
*글자 수 공백 포함 2453자, 미포함 1806자.

BGM : 제로베이스원 - In Bloom










세상이 파랗다.

비가 오는 날이면 이랬다. 마치 세상이 푸르스름한 필터를 쓴 것 같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밖에 내리는 저 빗소리를 제외한다면.
처음엔 일상생활은커녕 집에서만 생활하는 것도 어려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되어 이젠 어언 5년. 이젠 좀 적응되었지만, 여전히 알바 같은 바깥일은 할 수가 없었다.

사회에선 이런 현상에 '레인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느 날 몇몇 사람들에게서 갑자기 발견돼 대한민국에 혼돈이 일었지만, 현재의 인식은 그냥 심한 알레르기쯤 되는 것 같다.
정부는 이 현상을 가진 사람들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포장했다. 절대 저주 같은 게 아니라고, 시민을 안정시키기 위해. 타고난 멋진 사람은 무슨, 지옥이나 다름없다. 한동안은 빗소리가 끔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레인버스가 발견된 뒤 법이 개정되며 나 같은 사람들은 비 오는 날엔 합법적인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오늘 알바에 가지 않고 이러고 있는 거고.


사실 집에서 그다지 할 게 없었다. 온통 파랗게 보이기도 하고 소리가 빗소리밖엔 들리지 않아 음악 작업은 무슨 드라마 하나 볼 수 없었다. 평소에도 입이 짧은 편인데 파랗게 보이기까지 하니 먹을 의욕이 사라져 아침에 먹은 초코바 하나로 버티는 중이었다.
할 게 없으니 계속 자기만 해서 벌써 오후 1시. 이젠 잠들려 눈을 감아봐도 정신이 맑았다. 마침 현관 앞 쓰레기 더미가 보여 버리려 들고 나섰다.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장 정도는 가까워서 가볼 만했다. 대신 소리가 안 들리니 계속 주위를 살피며 버리고 올라왔다.



14층에 올라와 홀가분하게 손을 털던 중, 1403호의 문이 열렸다. 옆집 이웃이었다. 따뜻한 목도리에 어우러진 흰색 파마머리가 나를 보며 환하게 빛났다. 어라. 왜 혼자 색을 잃지 않은 걸까. 눈썹 사이가 미세하게 좁혀졌지만 바로 알아채고 풀었다. 저 사람은 과연 눈치챘을까.


"은유씨! 오랜만이에요. 방금 오셨나 봐요. 비가 와서 일이 일찍 끝났나? 평소보다 이르네요."
"...."

소리가 들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당연하게 들리지 않아야 할 목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내 귀에 꽂힌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벙쪄있자 내 표정을 살피곤 눈을 또르륵 굴리다 이내 말을 꺼냈다.


"아, 레인버스. 그거죠? 죄송해요, 제가 잘 몰라서. 이건 알아들으시려나..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자한자 입 모양을 뚜렷하게 해서 말한다. 이건 알아듣냐고 할 땐 주춤하며 얼버무리던 입이 이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바보. 다 들리는데. 빠른 그 순간에 생각해낸 말들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들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몰라 말을 아낀 거였다. 그 사람은 손 인사를 가볍게 건네곤 엘리베이터에 쏙 들어가버린다.
터벅터벅 1402호로 걸어가며 폰을 켰다. 이젠 파란 빛이 익숙해 폰 하나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대신 한 번도 겪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경험이 나를 두렵게 덮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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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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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지금 여긴 비가 와. 나 오늘 옆집 이웃을 마주쳤는데 그 사람은 색도 파랗지가 않고 목소리도 들리는 거 있지. 이게 대체 뭘 뜻하는 걸까. 혹시 그 사람은 타고난 걸까? 그렇다기엔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한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아픈 거야?'

혹시 나 곧 죽는 건가? 레인버스를 가진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젊은 나이에 죽기도 하다니! 신이시여, 제가 전생에 죄를 너무 많이 지은 건가요. 나한테 왜 이래?

파란 지식인을 켜보는 건 눈이 너무 피로해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레인버스 전용 모드 앱이 존재하긴 했지만, 핑계를 대자면 귀찮았다. 사실 무서웠다. 어떤 내용일지 모를 답변이 달리는 게 무서워서, 사람들이 덤덤한 말투로 어떨지 모를 사실을 말해주는 게 싫었다. 결국, 엄마에게 의지. 이게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생각인가. 그 사람이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우리 은유.. 비 오느라 힘들었겠다. 그래서 전화가 아닌 문자를 보낸 거겠지?
레인버스는 목소리와 색을 잃어버리잖아. 하지만 모든 일은 예외가 있댔어. 그게 바로 너의 이웃인가 보다. 그 사람은 비 오는 날 너의 기둥이 되어줄 거야. 꽉 잡으렴. 너의 운명의 짝이야. 분명 너도 처음 보자 마자 반했겠지. 엄마는 우리 은유가 그런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다. 너의 눈이자 귀가 되어줄 그 사람을, 부디 보내지 말아라. 엄마는 언제나 널 응원하고 사랑한다.'

뭐? 운명의 상대? 엄마 장난 치지 마.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꼬셔? 더군다나 그 사람은 나한테 관심 없고, 나도 그 사람에게 호감이라곤 없어!
라고 하기엔 얼굴이 너무 내 취향이었다.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도 내심 기분 좋았고. 그 사람은 그저 몸에 밴 습관일 뿐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설렐 수밖엔 없는데. 뭐, 내 운명의 상대라고 하니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죠. 레인버스가 도움이 되는 게 알바 째기 말고 또 있었다니. 이 정도면 정부에서 특별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게 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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