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가난한 나의 樂園에게
매년 하계가 오면 반복되는 일. 알러지라도 있는 것처럼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오는. 목과 눈두덩이가 부어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어.
포말이 몰아치다 스러지길 반복했다. 축축한 모래가 발바닥에 달라붙고 어느샌가 치는 파도에 수평선 너머로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마냥 지켜보기만 했다. 수온은 여전히 차고 영영 눈을 감아 비로소 홀로 남겨진 바닷가. 그리고 다시금 나는 상기한다. 불리다 만 이름들과 흐르다 만 시간들.
내 오랜 생은 말할 것도 없이 기구했다.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것이 어떤 괴로움과 외로움을 품고 살아가는지 모를 것이다. 앞으로도 알 일은 없겠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나는 존재하는 억겁에 가깝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 외형은 이십 대 중후반 남성의 형상을 띠고 있다. '외형'은 말이다. 까마득한 과거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들의 한 평생도 부족하다. 나이 같은 것은 안 센 지 오래다. 미처 이치를 깨닫지 못한 인간들은 이를 신의 祝福이나 恩惠 따위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신은 역시 존재하지 않고 만일이라는 가정 하에도 그리 자비롭지 못하다. 이것이 내 굳은 신념이다.
사랑 같은 감정은 이제 아득해져 잘 떠올릴 수 없다만, 나 역시 인간일 적에 낯부끄럽게도 누군가를 사랑한 적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 고백록을 적는 이유이다. 나는 차마 한 시라도 그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십오 세기쯤의 어느 여름이었다. 어리숙한 소년 무렵 나는 아마 달리고 있었다. 그녀도 멀리서 달렸다. 그리고 그녀는 넘어졌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선 일으켜 세워주었다. 고운 손을 잡고 나의 무릎쯤은 기꺼이 내어 벗겨진 신을 다시 신겼다.
― 아씨, 또 넘어지셨습니까.
네가 너무 빠른 걸 어떡하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치맛자락은 엉망이 되어버렸음에도 그녀는 웃었다. 나도 이를 따라 웃었다. 우리는 크고 넓은 나무 아래에 앉았다. 어깨를 딱 붙이고, 내가 자연스레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碧色빛의 여름 잎들이 찰랑이는 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나는 그때 첫사랑의 감정에 진탕 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후회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 아씨.
― 그 딱딱한 호칭 언제 그만둘래?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온몸에 힘이 빠져 그만 그녀의 머리칼에 입 맞추고 말았다.
― 비도야.
여름철의 개울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다. 양반댁 따님의 체통은 내다 버리기라도 한 건지, 짓궂게 물을 뿌려댔다. 나는 언제나 그녀가 뿌린 물에 익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와 그녀의 온몸이 젖었고 결국 우리는 여름감기 신세였다. 마르지 않은 옷가지들과 퉁퉁 분 손가락들. 한여름 추위에 떨어도 포기할 수 없는 연례행사였다. 영감에게 꾸지람을 듣고 매를 한참 맞아도 달리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자꾸만 웃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았다. 간병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해마다 두어 번 큰 열병을 앓는 그녀를 나는 피로한지도 모르고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미지근한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녀의 살갗은 뜨거웠다. 뜨겁고, 축축했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가를 한 번 쓸었다. 나는 그때 조금 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모든 것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밤새 울어 부어오른 눈두덩이와 열이 오른 뺨까지도. 얕은 숨에도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뛴다.
그녀가 선잠에 들었을 때, 굽널창을 열었다. 창 너머로 선명한 샛별이 보였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때만 한 샛별을 보지 못했다.
···.
記憶은 점점 흐려지는구나. 인간의 감정이란 참 지독하기도 하여서. 파도에 흘려보내도 결국은 옅어져 다시 스며버리네······.
그녀의 곁을 떠난 건 그녀가 서른에 접어들던 해였다. 언제나 그렇듯 여전히 소년이던 날 손가락질하던 인간들 탓이었다. 그녀는 그런 날 참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의 말이 들려오면 그 고운 손으로 내 귀를 막았다. 그녀는 아무리 늙어도 작기만 했다. 나의 뺨만치도 미치지 못하는데 그리도 무서울 게 없을까.
빨간 자두가 기억난다. 하계가 되면 산에서 자두를 따 그녀에게 한아름 주었다. 그해에도 같았다. 그녀에게 주는 마지막 자두는 유달리 붉고 달더랬다. 바구니에 새빨간 자두를 가득 담아 가는 길에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진정 열일곱의 아이처럼, 또 그녀와 나의 사랑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왜인지 온몸이 가려워져 피부를 도려내고 싶었다. 한동안 나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노을 지는 하늘이 그녀에게로 발걸음을 떠밀었다.
첩첩산중을 빠져나와 그녀의 班家로 가는 길에는 연안이 하나 있었다. 눈을 감아도 보일 만큼 익숙한 장소가 새삼 찬란했다. 그리하여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이상하리만치 크게 뛰는 심장박동. 이명소리. 나지막이 들리는 파도소리. 깨닫지는 못했지만 나는 두려웠다. 신이 다 닳아 나는 맨발로 걸었다. 언제나 성한 곳 없던 몸인지라 발에 생긴 생채기 따위는 별것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사뭇 여성스러웠다. 십삼 년 전 어리기만 하던 소녀는 어디로 갔는지. 그런 생각도 잠시, 나를 보자마자 품으로 뛰어든 그녀 탓에 나는 기껏 따온 자두를 모두 엎어버렸다. 코끝에는 어지러울 만큼 독한 단내가 풍겼고 모든 것이 시뻘겋게 물든 듯했다. 자두의 탓일까, 아니면.
― 아씨, 잠시만···.
사실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때 내가 무척이나 슬펐다는 것. 한참을 울어버리고 싶었다는 것. 또. 그녀가 내게 입 맞추었다는 것. 나는 아득해졌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체온이 앞으로 괴로워질 것을 앎에도 밀어낼 수 없었다. 나와 그녀는 인정받지 못할 것을 초장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나 또한 그러하겠지, 짐작했다. 그녀는 오랜 나의 평생을 괴롭게 한다. 나의 모든 기도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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