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그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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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8 17:16조회 66댓글 5othello
나는 아직도 책상 앞에 앉아 첫 이메일을 쓰지 못한 채, 화면 속의 흰 공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잔혹할 만큼 일정했고, 그것은 내 얼굴을 비추면서도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았다. 마치 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저 한 줄의 로그 데이터일 뿐이라는 듯이. 에어컨은 돌아가고 있었으나, 바람은 이 방의 공기를 식히지 못했다. 습기는 피부에 달라붙어 천천히 숨을 막아왔고, 나는 눈을 깜박이며 '쾌적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쾌적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수치와 기준으로 정량화된 환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23도를 선호하고, 누군가는 27도를 견딜 수 없다. 결국 모든 규범과 합의란 타인의 기준이 나의 몸 위로 덮쳐오는 순간일 뿐이다. 나는 그 합의에 참여한 기억이 없다.

마우스에 스민 땀은 손바닥을 조금씩 무겁게 눌러왔다. 그것은 단순한 불쾌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고통의 기호였다. 업무라는 이름 아래 남겨진 모든 클릭과 타자, 보고서와 번역, 서버와 고객. 그것들은 내가 누구였는가를 점점 흐리게 만들었다. 나는 어쩌면 회사라는 이름의 거대한 무대 위에서, 오직 '인간이 기능할 수 있다는 증거'로만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지만, 목덜미를 적시는 땀방울이 먼저 나를 붙잡았다. 웃음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무겁고 눅진한 한숨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숨은 곧 나 자신을 겨누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왜 아직 이 자리에 남아 있는가. 과거의 나에게 변명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미래의 나를 기만하기 위함인가.'

회의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급히 들어온 리더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흔들었다. "서버가 다운됐습니다. 고객사 전송 지연된대요.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공기가 순간적으로 뒤틀리듯 흔들렸지만, 나의 내면은 조용했다. 사람들의 분주한 손길과 헐레벌떡 움직이는 발소리는 그저 원거리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불과했다. 나는 모니터 속 커서를 바라보았다. 그 단순한 깜빡임이, 어쩌면 이 모든 소란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듯 느껴졌다.

나는 다시금 생각했다. 도시와 사무실, 규범과 혼돈, 나와 타인. 그 모든 경계가 무의미하게 교차하는 한가운데에, 이렇게 땀에 젖은 채 앉아 있는 내가 있다. 그것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단순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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