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사랑의 열매

설정
2025-09-10 17:43조회 35댓글 0onke
그 시절 우리 학교에선, 사랑의 열매라는 것이 존재했다. 말이 사랑의 열매지, 사실은 거의 불우이웃 돕기란 말을 돌려 한 것뿐. 그 당시엔 사랑의 열매를 거의 강압적이다시피 걷기도 했다. 사랑의 열매에 주기적으로 바치는 돈, 열매금. 열매금을 내지 않으면 아마 효자손으로 죽을 듯 팼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해는 1983년도. 누구 하나 맞아도 그러려니 할, 학생권 신분이 땅을 치던 시절이었다. 난 너무나 불우했고, 가난했고, 아팠다. 집에 밥 축내는 놈만 열댓 명이 넘으니 그만큼 학업에 돈을 쓰기란 부잣집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책가방, 교복 하나 살 돈이 없어 걸레짝이 되어가는 누이 교복을 빌려 덧대고, 덧대어 입고. 책 하나 살 돈이 없어 교육 과정은 맞지도 않는 교과서를 꾸역꾸역 들고 다녔다.

이런 내게 열매금을 내라니. 심지어 오천 원을?

부모님에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가져가지 않으면 맞는다는 것을, 뼈저리에 앎에도 행동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다. 밥 축내는 것도 어지간해 죽겠는데, 여기서 오천 원이나 더 빼간다는 걸 알면 얼마나 집안 경제가 망가질까. 열둘의 나이엔 감당할 수 없는 일, 알아 좋을 것 없는 일을 알아버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몰매를 맞는 것뿐이었다.

다음날엔 열매금을 내지 않는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명을 받았다.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눈치를 볼 친구도 없이 교실 한가운데에 나 혼자만 우뚝 서 있었다. 선생은 “ 네가 그럼 그렇지. ” 라며 교탁 바로 옆 아이들의 간단한 시선이 닿는 자리서 죽을 듯이 방망이로 종아리를 가격했다. 고통 담긴 신음을 삼키면서도 들은 생각은, ‵ 그래도 이게 낫네. ʹ 라는 문장 밖엔 없었다.

점심 시간엔 점심을 먹지 않았다. 기껏 싸주신 먹음직한 한상이었지만 별로 먹고픈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이들이 거의 모르는 비상구 옆 계단에서 혼자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훔쳤다. 완전 아이 같은 울음은 아니었으나 소리 없는 울음으로 꾸준히, 일정한 박자로 들숨과 날숨했다.

밖에선 아이들의 축구 소리가, 안에선 여자 애들의 수다 소리가 함께 양 귀에 흘러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소음이라 정의하기로 했으나, 결국은 나조차도 그것을 바랐음을 깨닫고 다시 들숨과 날숨을 시작했다.
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