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채는 병실의 모든 문을 닫았다. 그 작은 종이가, 그 낡은 Mp3가 자신에게 남겨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네가 한 약속을 꼭 지킨다는 걸 난 알았다. 디퓨저가 없어진 병실에는 열린 창 사이로 내민 바람 냄새가 났다. 그리고 짠 눈물의 냄새가 났다. 이제는 그 눈물 냄새를 가려줄 디퓨저도, 향수도 없다.
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질퍽······.
하지우가 Mp3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의 엄마가 준 마지막 선물이기 때문이다. 3년 전 아무것도 안 들어있어 텅 빈 Mp3 버튼을 괜히 달칵거리던 하지우를 기억한다. 나의 구원이었던 그 애를 기억한다. 작년 가을의 공기는 서늘했다. 평소처럼 장난을 치는 하지우에게 죽인다고 장난을 치던 날, 하지우는 유서도 준비하지 못했다고 웃었고 거기에 내가 그렇게 답했다. 존나 형식적인 유서 말고 차라리 편지를 쓰라고. 이 누나가 그걸 읽고 친히 펑펑 울어주겠다고. 하지우는 못한 말 다 적으면 A4용지 다섯 장은 나오겠다며 빈정거렸고 나는 내 욕이 그렇게 간절하냐고 물으며 딱밤을 날렸다.
질퍽질퍽순애
A4용지는 개뿔. 딱 봐도 작은 공책 뜯어서 쓴 쪼가린데. 대충 고마웠다는 말이 담겼을 편지보다 Mp3에 먼저 손이 갔다. 이게 너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내가 아는데. 아직 이건 텅 비었을까. 조작법을 몰라서 한참을 뒤지다가 겨우 음악 재생을 할 수 있었다. 목록은 나오지 않아서첫 노래 재생이라는 버튼을 눌렀다. 그 속에서 나온 건 예상과 달랐다, 네 목소리가 담긴 절절한 메세지도 아니었고 욕을 존나 녹음한 것도, 그냥 성능을 실험한 것도 아니었다. 지나치게 익숙한 노래. Mp3 화면 하단에 하지우가 직접 입력했을 노래 제목이 있었다.
Serenade - Diverseddie
- I'll serenade you
- Swaying under the moonlight with me
- Got it planned in my head
- Tonight, it’s a chilly surprise
- But don’t you dare
- Ask about it baby
- I’m no good at concealing my mind
- 求你你就别去
- 假装你不知道
- For me
중후한 목소리가 기계음을 타고 흘렀다. 지겹게 들었고 또 좋아했던 노래라 가사와 함께 의미가 뇌리를 스쳤다. 내 마음을 숨기는데 영 소질이 없거든. 그러니 모른 척 해줘. 나를 위해. 손이 덜덜 떨렸다. 세레나데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이은채는 확신했다. 그리고 절망했다. 숨기고 싶었고, 동시에 들키고 싶었던 하지우의 진심을, 다르게 말하면 사랑을 알아버렸다.
하지우는 이은채를 사랑했다.
생사를 넘어서, 이 작은 Mp3 너머로 하지우는 사랑을 부르고 있었다. 나를, 이은채를, 개새끼를 사랑한다고 온 힘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하지우는 나를 사랑했었다. 차마 모른 척 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알아차린 이은채는 더 이상 멀쩡히 그것들을 알 자신이 없었다. 하지우의 남은 조각들을 받아들일 자신이 전혀 없었다. 남은 노래를 듣기 무서웠다. 공포스러웠다. 나 자신이 너무 끔찍했다. 하지우는 어쩌다 열병을 앓았을 지.
다음 노래가 나오기 전, 이은채는 허름한 종이 쪼가리에 샤프로 쓰인 글을 읽었다. 조금 번져 있어서 시간이 걸렸다. 이은채는 한참을 한 문장에서 머물다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걸 반복했다. 천천히 하지우의 마지막을 읽었다. 예상한 뻔한 내용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그리고 이은채 본인도 잊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은채는 히지우와 다르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은채는 하지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밤바다는 너무 추워 그니까 다음에는 낮에 가자
그때 하늘은 맑으면 좋겠다
파도는 헤엄치며 나오긴 너무 깊으니깐
만약 다시 시작된다 해도 우리는 서로가 될까?
삐뚤한 글씨를 읽으며 네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내가 그걸 바란건지, 아니면 내가 미쳐버려 환청이 들리는 건지. 솔직히 편지를 읽는다고 흐르던 다음 노래가 잘 들리지 않는다. 단조로운 음과 역시 낮은 목소리. 아래는 봄눈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흐릿하게 들리는 소리들은 전부 네 글 아래에 묻히다가, 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 그 때 나온 가사와 그 한 줄이 엉켰다.
- Cause I'm falling slowly love with you
- 오랫동안 기다려온 너는 봄이야
- Cause I'm falling slowly love with you
- 다시 지워진다 해도
- All my life is you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내 안에서 멈췄다. 다시 시작된다 해도, 다시 지워진다 해도, 내 삶은 전부 너야. 우리는 다시 서로가 될거야. 만약 우리가 다시 만나면. 지워져도 다시 만나면. 우리가 여전히 서로로 전부라면.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불쾌하다고 해야 할까. 오래 꿈꾸던 바램을 만난 기분과 동시에 꿈과 현실, 그리고 망상, 또 무의식이 뒤섞이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시작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넌 이미 죽었는데 뭐 다시 시작한다는 걸까. 네가 다시 시작하겠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도
그 다음을 함께하고 싶었다.
이은채가 느낀 기이함과 별개로 이은채는 그날 두 감정에게 삼켜졌다. 하나는 알지 못했다는 죄책감이고, 하나는 드디어 사랑이었다. 존재하지 못할 하지우의 다음이 무엇인 줄 알고 이은채는 그곳을 함께하고자 결심했을까. 만약 이은채의 마음이 달랐다면 다음 운명은 그들을 따르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러니 영원히 이은채는 더더욱 하지우의 다음으로 가고자 했다. 이은채는 그래야만 했다.
사라지지않을구원을줘
유한하지않을서로를더지켜줘
너의사랑만이진짜가아니란걸알아줘
https://curious.quizby.me/ugun…^ 퇴고 없어요 아픈사랑뻔한사별
BGM 01 Serenade - Diverseddie
BGM 02 봄눈 - 1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