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운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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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6 08:38•조회 21•댓글 2•여우비
머리칼을 쓸어서 정리했다. 약속 시간까지 15분 정도 남아 있었다. 거리의 나무마다 꽃이 활짝 폈다. 날씨도 훨씬 따뜻해졌다. 정말 봄이라는 게 실감이 갔다.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주위를 살폈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5분 전 네게 보낸 메시지가 아직도 안 읽음 표시였다.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전화가 울렸다. 햇살을 받은 휴대폰 액정 때문에 수신자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받았다.

“여보세요?”

—어디야?

익숙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었다. 순식간에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공원 벤치.”

—그리로 갈게. 10분, 10분이면 돼.

나는 웃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괜히 보도 블럭을 신발 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네가 나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여나 네가 보일까, 하고 멀리 바라보았다.

5분. 10분. 15분. 30분. 30분이 지나도 너는 오지 않았다. 불안을 뚫고 하품이 났다. 기지개를 쭉 폈다. 주위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무서웠다. 너는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깨버릴 아이가 아닌데,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생겼나, 어디를 다친 건가, 집에 무슨 일이 있나. 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다 헤집어 놓았다.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갈 때까지 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손에서 땀이 베어 나왔다. 일어섰다. 가만히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 길로 너의 집으로 향했다. 조급한 마음에 발걸음을 빨리하다가 두어 번 넘어질 뻔 하기도 했다. 저 멀리 네가 사는 빌라가 보였다. 뛰었다. 숨이 차 헥헥거릴 때까지 뛰고 뛰었다.

숨을 훅 내쉬었다. 천천히 빌라 앞으로 다가갔다. 어디선가 울음 소리가 들렸다. 울음이라니, 아기가 운다고 하기엔 너무… 네 목소리 같잖아….

“바다야.”

너를 불렀다. 울음이 뚝하고 멈췄다. 나는 빌라 옆 구석진 골목으로 다가갔다. 네가 골목 한쪽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두 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얼굴을 파묻은 채. 네 호수같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울음 소리의 주인이 너였나 보다. 나는 헐레벌떡 네게로 뛰어 가 너를 끌어 안았다. 두 팔로 꽉 네 등을 감쌌다.

“왜 울어?”

낮게 읊조렸다. 빠르게 너를 살폈다. 곳곳에 멍이 들어 있었고 왼쪽 무릎에는 피가 맺혀 있었다.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주먹을 꽉 쥐었다.

“누가 이랬어? 부모님이야? 아직도 때리셔?”
네가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거렸다. 나는 너의 몸을 감쌌다. 안아서 토닥거렸다.


*


너의 부모님은 너를 자주 때리곤 하셨다. 주로 술에 취했을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화가 날 때, 네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그때마다 너는 울면서 나를 찾아 왔다. 어릴 때만 그랬지, 커 가면서 너는 나를 찾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손 놓고 있었다. 네가 괜찮은 줄 알았다. 이제 맞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너는 그저 참고 있었던 것이었다. 죽을 만큼 아픈 상황에서도 나를 생각했던 것이었다. 부끄러운 모습을 더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후회가 밀려 왔다. 너를 지켜 주지 못했다. 구해 주지 못했다. 다독여 주지 못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차라리 나를 찾아 오질. 속 시원하게 다 털어 놓지 그랬어. 그러면 말 뿐인 위로라도 건넸을 텐데.

약국까지 달렸다. 연고와 반창고를 닥치는 대로 담았다. 비닐 봉지가 가득 찼다. 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멍이 든 몸 곳곳에 약을 발랐다. 까진 무릎은 소독을 했다. 소독용 솜이 닿을 때마다 너는 움찔거렸다. 안쓰러웠다. 부끄러운 건지 너는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반창고를 붙였다. 너는 내가 손을 때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 됐으니까 가. 꽃은 못 보겠다. 미안.”

“그깟 꽃 하나도 안 중요하거든. 집으로 가게?”

“내가 거기 말곤 갈 곳이 어딨어.”

“있어. 나랑 가자.”

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처음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씨익 웃어 보였다. 네 예쁜 눈이 아주 살짝 휘었다가 말았다.

큰소리 떵떵 치긴 했지만 막상 찾아 간 곳은 내 집이었다. 아파트로 들어서자 놀이터가 보였다. 놀이터 주변으로 늘어선 나무에 벚꽃이 활짝 피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너를 끌고 그곳으로 갔다. 나란히 그네에 앉았다. 너는 초록색, 나는 빨간색. 이미 우리는 많이 자라버려 그네를 타기엔 컸지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여긴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너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입에 미소가 번져 있었다. 너도 하나도 안 변했어. 여전히 웃는 게 예쁘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네 말에 대답없이 너를 바라보았다. 조금 더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왜인지 오늘따라 네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꽃이 활짝 핀 나무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너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바람에 나부꼈다. 그 꽃잎은 고스란히 네게로 흘러 갔다. 햇살을 받은 네가 빛났다. 넋을 놓고 네 빛나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뭘 봐.”

“내가 언제.”

“아까부터 나만 보고 있잖아.”

“착각은 자유지.”

괜히 딴청을 부렸다. 뒷머리를 만지며 살며시 일어섰다.

“갈까?”

“집엔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또 갈 곳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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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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