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꽃비 _ 25 / 07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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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온기란, 생각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별 것도 아닌 그 사람의 온기 가득한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얻곤 했고, 그의 말들을 하루종일 곱씹곤 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찰나, 심장이 고막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달빛에 물들어 반짝이던 그의 머리카락은 말라붙은 나의 시간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맑은 눈동자엔 내 어둠까지 비춰질까 두려웠다. 미우면서도 좋았던 그 사람. 그 순간 나는 그를, 다시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부러움까지 느꼈다. 밖에 나가는 일은, 그에겐 별 일도 아니겠지. 말 한마디에 힘이 실리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겠지. 부럽다는 말도 조심스러울 만큼.
그 날 이후로 나는 이 세상을 향해 작은 발자국을 남겨보려 했다. 언젠가 이 발자국을 다시 봤을 때면 별 거 아니라며 피식 웃으며,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나가는 이유는 단지 하나였다. 603호. 옆집에 사는 그 남자의 이름도, 뭣도 다 모르지만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사람. 그동안 603호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었다. 단언컨대 이 사람이 그 수많은 603호들 중 가장 다정하고, 가장 따스한 사람이리라. 어제 먹었던 눈물젖은 시루떡은 몇 년간 먹었던 음식 중 가장 따뜻했고 가장 맛있었다. 이럴 때 혜림이라면 고맙잖아, 보답해야지! 라며 간식거리를 사들고는 그에게 달려가겠지. 아직 사람을 만나는 건 두려웠다. 근처에 무인 편의점이 생겼나...?
딸랑ㅡ
밝고 명쾌한 종소리와 함께 나는 빠르게 달달해보이는 것들 몇 개를 가져와 계산을 했다. 하는 내내 손이 벌벌 떨렸고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던 손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땀이 났다. 눈 앞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그럴 때마다 603호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버텨보려 애썼다.
***
편의점 문을 나선 순간부터 발걸음은 무겁고 손은 얼어붙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603호 문 앞에 서있다. 그토록 기다렸고 또 오고팠던 그 곳. 막상 문 앞에 서니 두려워 미치겠다. 아까 전보다 땀이 더 나는 것 같았다. 목 뒤로 땀방울이 흐르는 느낌이 소름끼쳤다. 주먹 쥔 손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뚝.
주먹을 쥔 손 사이로 흐른 땀방울이 떨어졌다. 명쾌한 소리와 함께 주먹을 쥔 손도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 아직까지 노크는 안되겠다. 포스트잇이 붙은 비닐봉지를 조심스럽게 603호 문고리에 걸어두었다. 손을 벌벌 떨어가며 한참을 썼음에도 삐뚤빼뚤한 글씨가 그닥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이미 걸어뒀으니 다시 가져갈 생각은 없다.
이제서야 왜 시루떡을 빨리 받지 않았을지 후회가 들었다. 이런 기분이였겠구나, 그 사람. 비참하고, 창피하고. ...좀 미안하다. 다음엔 미안하다고도 해야지.
그 날은, 특별한 날이였다. 처음으로 밖에 나간 날. 혜림이 생각에 괴로워하지 않은 날.
쪽지가 바람에 흔들려 떨어질 듯 말 듯했다. 삐뚤빼뚤한 글씨 하나만이, 흔들리는 쪽지 위에서 끝끝내 자리를 지켰다.
'떡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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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꽃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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