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4 21:24•조회 28•댓글 0•단애
달빛, 궁궐 지붕 위를 스치며 은빛 강을 흘려 보내고,
대전(大殿)의 창호 너머 바람은 촛불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니, 사직의 기둥마저 무겁게 흔들리는 듯 밤의 숨결이 고요히 내려앉더라.
성상, 용상에 홀로 앉아 달빛에 눈을 묻고,
어린 시절 눈 덮인 골목에서 맞잡았던 작은 손길을 떠올리셨다. 그 손길이 오늘의 운명보다 무겁게 가슴을 누르는 것을, 성상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더라.
전각 깊은 곳에서 울린 북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며,
천지가 꾸짖는 듯한 울림 속에서도 성상의 마음은 깊고 고요히 흐르니,
“이 연, 하늘이 내린 것이라면, 짐이 거스를 수 없으리.”
입술 사이로 흐르며 달빛에 박혀 대전을 가르더라.
그때 창호가 살며시 열리고, 소녀가 달빛에 젖은 그림자로 서서히 드러나니 피 묻은 소복이 은빛으로 빛나고, 눈동자 속 공포와 체념, 오래 묻은 그리움이 섞여 흐르더라.
성상,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소녀의 손을 거두어 잡고
발자국이 궁궐 뜰 위에 깊이 찍혀 마치 천지가 갈라져 새 길을 여는 듯 은빛으로 빛나더라.
긴 강산을 건너며 수많은 칼과 피를 보았노라.
그 중 스친 목숨이 얼마였는지, 헤아림조차 허망하구나. 허나 그 모든 혼란과 살풍 속에서도 내 마음을 적신 것은 오직 그대뿐이었노라.
그대를 안기 위해라면, 천 명의 목숨쯤 어찌 아까우리오. 칼이 부러지고, 살이 찢겨 나가도 그대만은 내 곁에 묶어 두리라.
원망하였노라.
세상과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은 것을,
하늘조차 그대를 내어주지 않은 것을.
허나 그 원망조차 피가 되어 심장 속을 굽이치며 흐르더라.
그대여, 피 위에 서서 나를 보라.
꽃은 시들고, 별은 꺼질지라도,
핏빛 강물은 영원히 흐르며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리라.
밤하늘 별빛이 천 번 꺼졌다 켜져도,
그대의 이름은 내 입술에서 서서히 닳아 없어지리니,
처음엔 속삭임이었으나, 이제는 음절조차 바람에 흩날려 그대가 누구였는지 나조차 의심하게 되더라.
사랑이라 불렀으되, 이제는 허무의 다른 이름일 뿐.
그대의 손길은 기억에서 삭아,
무덤 속 해골처럼 형체만 남았으나,
잊으려 할수록 더욱 선명히 다가오니
망각조차 집착의 또 다른 얼굴임을 이제야 알았노라.
성상, 긴 숨을 내쉬며 홀로 대전을 거닐고
그대의 부재 속에서 끝없는 형벌을 짊어지며
피와 운명으로 그대를 내 곁에 묶고,
홀로 생애를 걸어가노라.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유스토피아에 신청하긴 했는데 많이 떨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