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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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6 11:11조회 31댓글 2Garri
이곳에 들어 온 인간들은 죄다 죽어버렸어. 다들 욕심이 많았거든. 공허를 견딜 수 없었거든. 그들 스스로의 피 속에 담겨 진 공허를 수용하지 못하거든. 공허가 혈관을 뚫고 허무라는 이름의 뼈가 되어 속살을 찌르는 걸 참지 못했거든. 그들의 목소리가 퍼져 나가는 흰 백지를 알아내지 못했거든.
하지만, 너는 조금 유용해 보여. 아직까지 죽지 않고 견디고 있잖아? 흰 백지 안의 3차원과 2차원이 곁들여진, 꼭짓점은 보이나, 모서리는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있잖아? 흰 백지 안의 흰색이 하얀색인지 흰색인지 최소한 구분은 하잖아? 이곳이 창백한 지, 아니면 너무나도 날카로운 목소리에 모든 것이 불타 하얀 재가 된 건 지, 구분하잖아? 나는 너 같은 인간을 처음 봤어. 이 공허와 허무가 깃든 땅에서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세상을 응시하다니.
이곳에 왔던 인간들이 보는 세상은 실제 세상이지만, 인간들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하지.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과 공허가 있는 것은 달라. 흰 세상만 보는 인간과 아무것도 못 보는 인간은 달라. 시각 장애인이 보는 세상은 일반인이 팔꿈치로 보는 세상이라는 말은 들어봤지? 그런거야.
허무는 네 친구가 될 거야. 네 친구는 너를 영원히 붙잡을거야. 너를 붙잡는 액체와 고체 그 사이가 되어 네 자유를 잡아먹을 거야. 네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허무의 식사만이 존재할 뿐이야. 너는 이제 배가 고파서 허무에게 음식을 구걸할 거야. 허무는 영문을 모른 채 네게 음식을 줄거야. 음식이 모래처럼 목을 아프게 만들어서 물을 같이 마셔야 돼. 그런데, 이곳에는 물이란 게 없어. 물은 H2O지만, 우리에게는 H(수소) 2개와 O(산소) 1개가 없거든. 허무를 마셔 볼래? 친구를 마시는 게 허락 될 지도 몰라. 허무는 네 적군이기도 하니까.
군인들이 적군과 참호 속에서 질병과 가스로 죽어나가며 고독과 광기로 싸우기 전에 불렀던 애국가와 군가를 네게 불러. 너는 이제 인간이 아닌 짐승만이 남아있다는 고독과 짐승들이 손톱을 긁으면서 만들어 내는 광기를 감당해야 하거든. 공허는 인간에게 고요와 동시에 광기를 만들어 내. 광기는 인간의 상상에서 나오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점차 짐승이 되어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들을 만들어 내거든. 돈은 점차 안중에도 없어져. 이곳의 화폐는 돈이 아니거든. 돈은 화폐 아니면 종이지. 이곳의 화폐는 그저 화폐야. 화폐 이외의 것이 될 수 없고, 화폐라는 가치를 빼 놓을 수 없지. 종이조차 될 수 없어. 금이나 구리조차 될 수 없어. 그저 화폐야.
그럼, 잘 살아봐, 미안해. 구원해 주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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