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5 13:50•조회 142•댓글 3•사유
달빛이 엷게 번지니,
창호 사이로 스미는 밤바람이 등불을 흔들더라.
그 불빛 아래 한 사람이 홀로 앉아 붓을 놀리니,
그 손끝이 분주하여 마치 천 사람의 혀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듯하였도다.
그는 스스로의 이름을 감추고,
무명이라 하는 가면을 뒤집어썼느니라.
그 속에서 그는 허다한 이름으로 분하여 나타나
남의 허물을 드러내어는 웃고,
자기의 글을 찬미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 화답하였도다.
—세상은 어리석도다. 누가 나인 줄 알랴.
그는 음흉히 웃으며 붓끝을 적셨고,
그 말들이 메아리처럼 번져
사람들은 그를 여러 이의 현명한 입이라 믿었도다.
허나 나는 보았노라.
그 수많은 이름들이 실은 한 사람의 그림자임을.
그는 칭송을 빙자하여 스스로를 세우고,
비난을 핑계 삼아 남을 허물었도다.
그 붓끝은 비수 같고
그 말끝은 독화살 같았으나,
끝내 그 독이 제 심장을 갉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도다.
남을 낮추어야 자신이 높아진다 여기는 그 마음이여,
참으로 옹졸하고 가련하도다.
허공에 비친 그림자가 어찌 진면목을 대신하리오.
그의 글은 세상을 찌른다 하나,
그 칼끝은 매양 제 몸을 향하리라.
나는 그를 딱히 미워하지 않노라.
다만 연민하노라.
이름을 버리고도 명예를 탐하니,
이는 마치 거울을 등지고 서서
스스로의 얼굴을 찬미하는 꼴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나,
그 실체는 바람 속의 먼지와 같도다.
해가 비치면 드러나고, 바람이 불면 흩어지리니,
그 허명은 찰나의 연기요,
그가 세운 성은 모래 위의 집이로다.
내 이제 깨달았노니,
무명은 비겁한 자의 방패가 아니요,
스스로의 낯을 묻는 무덤이더이다.
그대여, 이름을 버리고 목소리만 남기려 하느냐.
그리하면 세상은 그대를 잊고,
그대의 말만 공중에 떠돌다 사라지리라.
허명으로 얻은 즐거움이여,
끝내 그대의 마음을 삼키는 독이 되리라.
세월이 한 바퀴 돌아 등불이 다하고 나면,
그제야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믿었던 그 허다한 목소리들이
결국 하나의 메아리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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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名: 허명
⇒ 겉으로는 이름이 높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실속이나 덕이 없는 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