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4 18:04•조회 97•댓글 8•RmN
나의 여름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힌 빼앗겼다
내 여름을 가지고 사라진 범인은
가을에도 겨울에도 봄에도 없었다
사계가 아니었다 내게만 오로지 나에게만 삼계였다
미칠 것 같이 끈적하고 더운 나날들만 느껴졌다 시원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너와 있기만 하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듯싶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나의 여름을 빼앗아갔던 건 그 다음 여름에도 잊지 못할 지독한 첫사랑이라고
—
사랑한다는 그 말을 뱉기엔 너무 서툴러서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엔 그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미뤄왔던 말들을
결국, 너에게서 듣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봄을 영원히 유영하는 해파리처럼
그 손 잡고 뛰쳐나간 그 여름 사이에서
서로 끝나지 않을 사랑을 그려보자
왜냐면 난, 너를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
씻고 나오니 네가 없었다
왜지?
분명 씻기 전까지 거실에 있었는데… 밖으로 나갔나? 나를 두고서?
그럴 리가 없는데, 날 두고 떠날 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현관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 내 머리 위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었다 놀랄 정도로 따뜻하게
바깥에 보이는 건 푸른 나무들?
뭐지? 분명 겨울 아니었나?
문을 다시 닫고 열어봐도 똑같은 광경.
머리가 아프다 눈이 아프다 휘청인다 어딨어 어디갔냐고 뭐야 뭔데 트루먼 쇼 같은 건가?
저 멀리 네가 보이는 것 같아서 손을 뻗으니 멀어진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사라지지 마 가지 말아줘 떠나지 마 사라지지 말라고 제발
멀어지는 너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계속 계속 그렇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 뒤를 누군가 쫓아오고 있었다 너인가?
네가 나를 붙잡았다 아 사라진게 아니었구나 그럼 그렇지
아니야 너가 아니야 넌 누구야 넌 누군데
팔을 휘둘러서 너를 쫓아내려고 했다 그럴수록 더 꽈악 붙잡았다 그러곤 나를 꼭 안았다 따뜻해 이상하게 머리가 가라앉는 기분
뇌내가 맑아지자 드디어 뒤를 돌아보자
나를 안고 가쁜 숨을 헐떡이는
—
현세에 존재하나 이질적인 세계,
현세에 존재하지 않으나 이질적이지 않은 세계.
유토피아를 찾기엔 내가 너무 커버렸고
노스텔지어에 당도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서 시작할까
쓰고 싶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싶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러한 나의 이상들은 철저히 부숴져 여름의 잔영이 되고
탐화봉접하며 자유롭게 하늘 유영하던 때가 그리워
봄의 잔해 뒤지며 그해 여름의 풀향 가슴속에 묻는다
천지개벽되던 그시절 찾던 오묘한 우주의 이치는 이미 다른 누군가가 찾아낸 듯하여
아카시아꿀 긴 대롱으로 뽑아먹으면서 신세한탄이나 해본다
저기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야 그 사거리 위 길은 잘 찾아가느냐
형형색색 비단옷 둘러봤자 연하고질 어디 가지 않는지 강산으로 빙글빙글 날아가 격세지감을 반복한다
녹음방초 속 흩어진 봄의 잔해의 탓으로 돌리곤 무시했던 여름향기가 내 코끝을 찔렀을 땐
애매한 추억으로 국한된 여름일 뿐인데 왜 이리도 마음이 저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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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망가진 채로 오르골 음악 맞춰 빙글빙글
춤추듯 멀어지는 트윈 레이와 붉은 실
무슨 말을 하던 다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는 줄 알았는데
차갑고 따뜻한 염동설한 속 따스함이 마음을 휘청이게 해
넘어가면 안되는데 마음 접었잖아 그래도 한 번 더 믿고싶어
이번에는 날 떠나지 않을수도 있다는 그런 허황된 망상으로 다시 묶은 붉은 실은
사실은 썩은 동앗줄 가져다 붉게 물들여 나와 묶은 거였네
나만 힘을 뺀다면 나만 잊어버린다면 지금도 과거도 전부 행복하고 행복했을까
아무래도 그 여름날 시작해 겨울에 열매가 맺히고 봄에 파내어진 마음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어
봐봐 지금도 120일째 잊지 못하고 어디간 지도 모르는 너의 잔해 속에서 헤메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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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 백업해도안끝나요계속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