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urious.quizby.me/zeoz…여름 끝자락의 온기가 아직도 서늘하게 반지하를 비추고 있다. 볕 하나 안 드는 곳이지만 시선으론 이미 충분한 일광욕을 마쳤다. 사부작거리는 발 밑 낙엽이 거슬릴 때 점차 가을이 곁으로 다가온다. 신의 뇌는 조금 더 커지고, 우의 뇌는 조금 더 작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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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가을이 아니라 다행이다. 벌써 두꺼운 겉 외투를 꺼냈다간 세탁하는 데에 세제가 더 많이 들어갈 테니까. 아직은 전기장판 하나로 둘이 버틸만 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신이 감기에 걸리기 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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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어째서 이리도 불공평한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지독하게 앓는 신을 보니 우의 어깨도 한층 무거워진다. 우가 하고 있는 일은 무려 다섯 개. 카페, 편의점, 상하차, 치킨 가게, 물류 센터. 등에 파스만 수십 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걸 우 자신이 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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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처음으로 수박이 먹고 싶단다. 한 통에 이만 원이라 쳐도 두 시간 일한 값을 통째로 날리는 셈이다. 허나 어쩌랴.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이 먹고 싶다 하면 간도, 쓸개도 빼줄 수 있는 것이 참된 도리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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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을 신이 먹기 좋게 자르던 우의 손가락에서 송골송골 피가 맺혔다. 순간적으로 나온 고통의 신음에 아픈 자신을 제치고 신이 깼는지 먼저 확인했다는 것을 깨달은 우가 비참함에 수박으로 눈을 흘긴다. 새빨간 수박의 속살에 검지 손가락을 고요히 묻으며 피를 감추니 방금 일은 전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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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입가에 수박 과즙이 흘러 이불을 조금 적셨다. 우가 신의 입술을 가볍게 닦으며 천천히 먹으라 언질하지만 신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난생 처음 맛본 수박이 너무 맛있다며 금세 신이 수박 반 통을 해치웠다. 신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면 수박은 물론 안 먹어본 과일이 없었을 텐데,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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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을 먹자 신이 금방 활력을 되찾았다. 독감까진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한 우 자신이 밉다고 생각한다. 연우, 이 멍청한 놈. 동생보다 병원비가 더 중요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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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여운이 조금 가시자 이제 가을의 낭만이 점점 다가오기 시작한다. 발 아래로 사각거리는 낙엽의 향과 느낌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은 우가 제대로 된 가을을 아직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아서. 누린내가 나는 은행들이 길바닥에 널려 있지만 그것들을 전부 치우는 건 우의 몫이다. 제 창문으로 해괴한 냄새가 들어오는 건 막을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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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도, 참 잘 버텼다 생각한 우였다. 비록 두 고비나 더 남았지만 두 고비나 지난 김에 마저 둘 더 버텨야 하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