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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0 00:10조회 67댓글 1소야
나눠 올리기 귀찮아서 한개로 통합합니다
재탕 죄송해요ㅠㅎㅎ 완결까지 다 써뒀습니다 좀 많이 길어요





이유담은 전장에서 말 타고 전두지휘하는 사령관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릴 적 절절했던 첫사랑을 떠올렸다. 서한결. 기어코 왕국의 개가 되었구나. 하늘을 치솟은 장검이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나고 이유담이 백마의 목줄을 세게 죄었다.


일반적이라면 적군과 아군의 총사령관이 직접적으로 검을 부딪힐 일은 오지 않겠지만 이유담은 전술 전략은 개뿔 때려치라 하고 적진 한가운데에 있는 서한결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유담이 지나갔던 자리엔 말이든 사람이든 시체 한둘씩은 쓰러져 있었다. 역시 그는 사령관보다는 최전선을 달리는 기사에 더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승마 실력이 헛것이 아니었다는 듯 말도 제 몸처럼 잘 다뤘다. 치고나오며 검을 겨누는 이유담을 노려보다 서한결은, 뭔가 알아차렸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하리만치 닮은 움직임. 어딜 찔러올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방어적인 레이피어 검술. 검날과 검날이 맞붙어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난다. 어릴 적 힘겨루기 싸움은 항상 이유담이 승리했었지, 아마. 역시 힘싸움에서 밀린 서한결은 미간을 찌푸리곤 검을 교묘하게 돌려 칼날을 올린 뒤 찌르기를 시도했다.


그게 통하겠냐, 내가 가르쳤는데.


그러자 복부 쪽에 틈이 보인다. 검을 밀어 넣으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이유담은 잠시 고민하다 그냥 봐주기로 했다. 꼼짝없이 죽음을 예견한 서한결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동귀어진이라도 노려보고자 이유담의 낮짝에 검을 겨눴는데 살을 베는 감각은 커녕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뒤늦게 고갤 들어 이유담을 목도하니 재밌는 걸 봤다는 듯 웃고 있었다. 서한결이 치를 떨며 소리쳤다.


- 씨발. 이유담!
- 후배님. 이게 몇 년 만이지?
- 죽어! 죽으라고!
- 선배가 말하는데 대꾸도 없고.
- 지금 눈에 살기가 어렸는데 무슨!
- 그래서 봐 주고 있잖아.


또 빈틈. 검을 내지르자 서한결의 금빛 머릿결이 잘려나갔다.


- 그렇게 천재라고 추켜세워지던 서한결은 어디 가고 이런 좆밥이 총사령관을 맡은 거지?
- 닥쳐!
- 솔직히 말해. 너 서한결 아니지? 그러게 부대에 남으라니까.


서한결의 눈빛이 흔들린다. 저 눈이 뭘 의미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기에 이유담은 심정이 무거웠다. 전적으로 제 잘못이긴 한데. 그래도 저렇게 싫어할 건 없지 않나.


이유담이 뚫은 적진의 빈틈 사이로 아군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다. 애초에 새벽밤 급습이 아니었다면 전선이 이렇게까지 밀릴 일도 없었다. 제국은 강력했다. 서한결이 예상했던 것보다. 아마 이유담이 없었어도 제국은 승리했겠지. 양쪽에선 적군이든 아군이든 셀 수도 없이 쓰러지는데 이유담과 서한결은 각자에게만 칼을 겨누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챙 챙 하고 칼 맞받아치는 소리가.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이유담은 이미 곱절 죽었을 것이다.


- 후배님, 우리 회포 풀 거 많지?


전장은 어느덧 끝을 달려가고 있었다.


- 그러니까 넌 내가 데려갈게.


반전은 없었다. 제국은 성대하게 승리했고 왕국은 감히 제국에게 덤빈 벌을 받아야 했다. 모든 물자를 뺏기고 천문학적인 보상금을 물었다. 수많은 여자들과 병사들, 고위 귀족과 왕족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개중엔 명예남작이자 왕국의 총사령관인 서한결이 있었다. 따라서 이유담은 전쟁이 끝나고 며칠 뒤 황제에게 부탁해 전쟁 포로로 끌려가던 서한결을 제 대저택 지하실에 가둬 두었다.


- 영원히 싫어할 거야.


첫사랑과의 두 번째 악연은 그걸로 시작되었다.











207374.
W 소야











이유담은 어릴 적부터 빈민가에서 부모에게 헐값에 팔리거나 길거리에 죽어가는 애들 몇 명 납치해서 만든 제국의 소년병 특수양성부대로 길러졌다. 왜, 어떻게 그 특수양성부대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의식의 기점인 네 살 적에도 부대에 있었으니까. 어릴 적은 나이가 깡패라 불림에도 이유담은 또래 중에서 유독 특출난 편이었다. 심지어는 두세 살 위쪽 라인까지 이유담이 꽉 잡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이유담은 열세 살 적 이미 고등 특수훈련 코스를 밟고 있었고, 손이 잔뜩 부르튼 채 폐급들이나 받는 신입들 잔처리 당담으로 열한 살짜리 애 검술 좀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땐 항의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개인 훈련을 끝내고 자정이 다 돼서야 신입들이 주로 이용하는 낡은 검술장으로 찾아가니 내 소문을 들었는지 이유담 이름표를 보곤 어린 놈들은 기겁하며 물러갔다. 가르치라던 서한결이 누군가 하고 돌아보니 열두 살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마른 어린애 한 명이 표독스레 자길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니가 서한결이냐?
- 맞는데 왜?


따박따박 고참한테 말 놓는 꼴 보니 교육을 덜 받긴 했나 보다. 대충 바닥에 떨궈진 검 보니 길이가 오십 센치도 안 되었다. 이런 단검류를 다루는 건 오랜만인데. 대충 휘두르며 감 좀 잡고 몇 대 패니 바닥에 주저앉아 그제야 서한결은 요 자를 꼬박꼬박 붙이기 시작했다.


- 왜 왔어······요.
- 선배.
- ······선배.


서한결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그럼 왜 때린······?


미친놈 보는 듯한 표정이다. 아무래도 빈 말은 잘 못 하는 것 같았다. 괘씸해서 몇 대 더 때리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무시하고 목검이나 들고 오라고 했다. 서한결은 고분고분 말도 잘 들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목검을 쥐었다. 그러나 검을 쥔 자세부터 잘못됐다.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야?


일단 시험삼아 기초 자세부터 몇 개 가르쳤다. 이상하게 찰떡같이 받아먹는다. 손속을 두지도 않았는데 처 맞을 때부터 눈 한 번 감질 않더라니. 역시 뭔가 있나.


혹시 싶어서 바로 검술 자세로 들어가니 처음 하는 거라곤 믿기지 않는 속도로 진도를 빠르게 따라잡았다. 그냥 동작만 잘 따라하는 건가 싶어 지금까지 배운 동작을 시연해보라 시키니 웬만한 일 년차 신입들보다 자세가 정확했다. 어이가 없어서 검으로 때리려는데 서한결은 그걸 또 막았다. 그래서 이유담은 서한결이 절대 못 막을 검술로 다시 쥐어 팼다. 서한결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다. 니 눈 동그란 건 알겠는데 그런다고 안 봐줘.


- 여기 왔으면 맞는 것 정돈 당연하게 여겨라. 수업은 여기서 끝. 내일까지 복습해 와.


서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퉁퉁 부어선 말라 빠진 몸이랑 전혀 안 어울렸다. 얼굴은 쓸데 없이 잘생겨서 서한결은 특수부대같은 곳 말고 순정만화에나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여긴 그딴 얼굴 필요도 없는데. 특히 노랗게 물든 머래칼이 더 그랬다. 자연인지 물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밝은 머리는 어두운 곳에서 특히 눈에 더 잘 보여서 숨었을 때 들키기 쉽다. 간부한테 노란 머리 애로 기억돼서 맞을 때 더 잘 불려갈 것이다.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이상성욕자들한테 끌려가서 해코지 당할 가능성도 있다. 이유담은 자살한 수많은 동기들과 방심한 사이 덮치려던 선임들을 떠올렸다. 이유담은 그들 모두 때려눕쳤지만 서한결에겐 그만한 힘이 없다.


때리는 건 혼자로도 충분하긴 했고. 오늘로 또 많이 배웠을 테니까. 이유담은 동기들에게 서한결이라는 신입이 한 명 들어왔는데 황제의 선임을 받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이제 한동안 서한결을 괴롭히는 사람은 없겠지. 뒤늦게야 쥐좆만한 게 제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아서 괜히 정을 더 줬나 싶기도 했다.


그때 이유담이 미처 몰랐던 건 서한결의 싸움 실력이었다.


서한결은 어릴 적 빈곤에 시달리던 부모에 의해 슬럼가에 버려져 그곳에서 갱단처럼 살았다고 한다. 검술같은 거 배울 생각은 당연히 못 했고. 사람들 지갑 뜯어 위쪽에 상납하는 구조로 청소년 부랑자들과 함께 생활했다는데, 여기 들어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열두 살짜리 애 한 명이 혼자 청소년 가출팸을 박살냈기 때문이었다.


서한결의 기개나 꽉 쥔 주먹 같은 것들은 길거리 싸움에 적격이었다. 전쟁은 우습게도 좀 고급진 길거리 싸움과 같았고 서한결을 좋게 본 직원이 밥 먹고 재워줄 테니 부대에 들어오지 않겠냐 제안하니 가출팸 내에서 굶주리며 살아온 서한결이 곧바로 수락해버린 것이었다.


십 대 후반 애들을 주먹으로 줘 팼는데 또래 애들이 검술 좀 전문적으로 배웠다고 서한결이 이기지 못할 일은 없었다. 서한결은 부대에 들어오자마자 이름부터 날렸고 따라서 서한결에게 높은 기대를 품은 고위 특무원들이 이유담에게 직접 수업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걱정 따위 하지 않았어도 서한결은 알아서 잘 먹고 잘 살았을 거라는 뜻. 말이 퍼지고 변형되어 서한결이 황제의 숨겨진 열셋째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지 않았을 때에도 일곱 살짜리 미친 천재 한 명이 들어오자마자 애들을 다 때려눕혔다는 소식을 주변에 좆만큼도 관심 없는 이유담을 제외하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찌됐든 그 이후로 이유담은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에 나갔다. 수업 첫 날부터 바람을 가르는 검을 보며 느꼈지만 역시 예사롭지 않은 습득력이었다. 이유담은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칼로 찌르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언젠가 내 자리를 뺏길지도 모르겠다는, 뭐 그런 천재들 사이의 고민. 그래도 스승이니 서로 검을 겨누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제대로 될련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은 그렇게 귀찮게 여기던 서한결을 볼 때마다 이유담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낮 훈련에서 개같이 처맞아도 저녁에 서한결 볼 생각만 하면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훈련 도중 힘들어 미칠 것 같을 때 서한결 한 마디 외치면 힘이 샘솟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맞을 때에도 서한결이 붕대 감아주는 상상부터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뭔 병에 걸린 것 같았다. 그렇게 부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화가 잠시 찾아오나 싶었다.









늦은 밤 서한결과 일대일 수업을 끝내고 호실로 들어가려던 이유담은 기숙사 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총감을 봤다. 무슨 일이시냐고 물으니 피곤하단 눈치로 이제야 왔냐며 눈치를 줬다. 양성부대산 강약약강의 표본인 이유담은 죄송하단 말밖에 못했다. 총감은 이유담을 방 안으로 들여보내더니 자기도 따라 들어왔다. 뭔 말을 하려고 이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그러더니 총감은 갑자기 청천벽력같은 말을 꺼냈다.


- 요즘 서한결이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아.
- 도망치다니요?


이 철통같은 부대에서 도망을 어떻게 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자 총감이 뒷말을 덧붙였다.


- 이번에 중요한 임무 하나 맡았잖아. 요즘 제1왕국에서 반역의 조짐이 보인다고, 귀족학교에서 국왕 첫째딸 좀 꼬셔서 정국 좀 살피고 오라고.


서한결 정도 얼굴이면 저런 임무도 맡을 만했다. 저번 달만 해도 고백했다 차인 동기들이 한 트럭이니. 요즘들어 대낮부터 저녁 늦게까지 서한결이 안 보인다 싶긴 했는데 학교에 다니느라 그랬던 거였군. 초등학교에서 애들 놀아주는 서한결을 떠올리니 그건 좀 웃겼다.


- 제1왕국이랑 접선해서 맘 먹고 이쪽이랑 줄 끊으면 우리도 못 잡아. 그렇다고 임무를 포기하기엔 너무 중요한 건이라······ 이쪽에서 마음대로 못 해. 급하게 회수했다가 왕국에서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채면 바로 전쟁이란 말이지.


제국 입장에서도 왕국과 전쟁하는 리스크를 짊어질 바엔 서한결 한 명 버리는 게 이득이다. 서한결이 그렇게 배신하고 떠날 사람 같진 않았지만 총감이 이렇게 확신하고 떠드는 걸 보면 제국의 정보력이라도 개입한 듯싶었다. 속으로는 응큼하게 떠날 생각을 하고 오늘 내 수업에선 바보같이 웃고만 있었다 이거지.


- 그러니까 가지 말라고 걔 좀 꼬셔 봐 너가.
- 제가 어떻게 꼬십니까?
- 걔가 말 잘 듣는 사람이 너밖에 없는데 뭐 어째.


이유담이 좀 많이 때리긴 했다. 그렇다고 떠나지 말라고 협박하면서 때리자기엔 통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요즘들어 이유담은 체벌에도 꽤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검술을 배운 지 꽤 돼서 그런지 서한결의 방어술 실력도 장난 아니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하는 이유담을 보며 총감이 고민하다 툭 뱉었다.


- 정 안되면 미인계라도 써봐.
- 예?
-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얼굴로 귀부인 꼬셔서 암살하는 일 같은 거. 이미 임무도 몇 번 맡았다고 기록된 거로 알고 있는데.


서한결 못지않은 꽃미남으로 유명한 이유담에게도 별 같잖은 얼굴 내세우는 임무들이 많이 주어지곤 했다. 아니 씨발 근데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서한결은 아직 열세 살밖에 안됐고 심지어······ 남자애잖아.


- 그게 남자애한테도 통해요?
- 낸들 어떻게 아냐. 이미 예쁘장한 여자애 몇 명 보냈는데 반응도 안 하더라. 심지어는 게이라는 소문도 돌던데.
- 게이요?
- 동성애자 말이다.


아. 순간적으로 웃을 뻔했다. 이유담이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 그러니까 저보고 서한결 꼬셔라 이거죠?


젖먹이 어린 애 꼬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지금까지 이유담이 꼬셔 온 여자가 몇 명이던가. 그 잘난 얼굴로 눈웃음 한 번 날려주면 코피 쏟고 손 한 번 잡아주면 신이라도 마주한 듯 황홀해했었지. 뭐 남잔들 다를 바가 있나. 혹여나 서한결이 진짜 게이가 아니더라도 상관 없었다. 이유담은 직감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감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쩌면 그건 해야만 한다는 감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본인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그건 서한결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유담이 열한 살이나 먹었음에도 여성에게 성욕 한 번 못 느껴봤다는 건 확실하게 이상했다. 이유담은 원래 모두 이런 줄 알았고, 서한결만 생각나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건 그냥 스승의 도리인 줄 알았다.


넌 절대 못 보내. 내 제자가 날 두고 어디 가려고?

뭐 그런 잘못된 소유욕.


이유담이 그랬듯 서한결은 검술이나 암술 같은 것엔 남달리 뛰어났지만 사랑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대의 커리큘럼은 완곡하게 정해진 바였고, 싸움과는 하등 관련 없는 에이 비 씨 같은 문자 언어나 키스 하는 법 따위 가르친 적 없었단 뜻이었다.


그래서 서한결은 이유담에게 느껴지는 이 감정이 뭔지 아주 오래 고민해야만 했다.


왜 이래. 왜 쟤만 보면 심장이 뛰는 건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이젠 얼굴만 봐도 맞을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건가? 이유담 앞에서만 손이 벌벌 떨리고 그래서 검술 시연도 제대로 못 보여 줬다. 이유담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머리끝까지 울렸다. 심지어는 찌릿찌릿 아프기도 했다. 이상하게 자길 아프게 하는데도 서한결은 이유담에게 더 다가가고 싶다는 모순을 느꼈다.


학교에 와서도 줄곧 심장에 병이 생긴 게 아닌가, 의무실에 갈까, 하고 고민하던 서한결은 지각을 간신히 면한 국왕의 딸을 보곤 깨달았다.


- 한결아 마이쮸 먹을래······?


몸을 베베 꼬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빨갛게 물들여선 먹을 걸 건네는 꼴이 딱 제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 서한결은 표정관리 하는 것도 까먹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씨발.

나 이유담 좋아하냐?


그 싸이코패스를?

내가?












동시에 이유담은 서한결의 태도가 미약하게 달라졌음을 느꼈다. 수업 중 자세 교정이 필요할 때 터치라도 하면 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제대로 움직이질 못했고, 저번엔 왕국의 마이쮸라는 간식을 들고 와서 이유담에게 건넨 적도 있었다. 이유담 정도 기수나 서한결 정도의 엘리트는 당연히 식량 걱정도 없지만 부대 내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애들도 흔히 보일 만큼 음식이 귀했으니 단순히 호의만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유담은 수많은 경험상으로 서한결이 자길 좋아하고 있다는 걸 반쯤 확신했다. 누구 꼬시는 것에는 이유담만큼 선수인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이유담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대상을 분석했다. 어떻게 해야 꼬실 수 있지, 어떻게 해야 내 걸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 부대 내 고등수업 졸업이 코앞인 이유담에게 총감은 이 임무를 졸업과제로 건넸다. 하여간 성공하지 못해도 졸업은 시킬 테니 열심히 해 보라고. 서한결이 나가면 제국의 미래에도 문제가 생기고 왕국에 부대 내부 정보가 흘러들어가도 큰일이니 딱히 졸업과제가 아니어도 중점에 두고 수행해야 할 임무임이 실제로도 맞았다.


그러니까, 서한결이 뭘 좋아할지 고민하는 건 단순히 제국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이유담이 씻고 나와 제 방에 누워서 고백 멘트는 뭐가 좋을지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이 당장 내일이었다. 고등수업 강의실에서도 가끔가다 마주치긴 했으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친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서한결의 감정과 태도를 종합하면 내일 고백해도 성공할 확률 구십 구 퍼센트다. 남친이 제국에 있는데 감히 왕국으로 넘어갈 생각은 안 하겠지.


사귈래? 는 아무래도 너무 무난하다. 오늘부터 1일은 일곱 살짜리 여자애 꼬실 때나 썼던 멘트고. 우리 연애할까 정도가 괜찮을까. 당황할 서한결의 얼굴이 눈에 서리고 이유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었다. 그간 제일 잘 통했던 멘트는 역시 좋아한단 말이었다.


정했다. 평범하게 얼굴이나 붉히면서 서한결을 좋아한다고 말해야지.












- 후배님.


수업이라기보단 대련에 가까운 수업을 마치자 바깥에선 해가 뜨고 있었다. 곧 서한결이 학교에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몇 시간을 내리 검질만 한 서한결은 이유담에게 맞아 퉁퉁 부은 뺨을 어루만지며 주섬주섬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이 고백할 타이밍이다. 이유담이 서한결을 부르니 서한결은 고개를 홱 돌려 이유담을 쳐다봤다.


이제 평범하게 얼굴이나 붉히면서······

평범하게. 제발 평범할 정도로만 붉히면서. 그 계획과는 다르게 걷잡을 수 없이 이유담의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래. 서한결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유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당황해서 얼굴을 두 손으로 더듬거리니 그제야 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말만 하면 되는데.

서한결을 내가······ 좋아한다고. 내가 널 좋아한다고.


- 좋.


아해. 그 세 마디가 뒤지게 어려웠다. 이유담이 마른세수하고 서한결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술 취한 것처럼 발이 제대로 안 나갔다. 서한결은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고, 이유담은 서한결 바로 앞에서 눈높이를 맞추려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정면으로 젖살이 다 빠지지도 않은 기생오라비같은 얼굴이 보였다. 이유담은 자기도 모르게 샛노란 서한결의 금발을 귀 뒤로 넘겨줬다. 답지 않게 생각도 거치지 않고 욕망대로 행동해버린 것이었다. 서한결은 흠칫 놀라며 얼굴을 뒤로 물렀다.


아, 좋아한단 말은 도저히 못 하겠다. 이유담은 목까지 빨개진 채 뭐라도 줘야 할 것 같아 제 검을 꽃다발인 척 건네며 말했다.


- 사귀자.


서한결은 민망할 정도로 눈만 깜빡거리다가 곧 경련 온 것처럼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이유담이 마저 뒷정리를 시작했다. 서한결도 이유담을 따라 바닥에 널부러진 검들을 벽에 걸어놓았다. 둘 다 얼굴만 죽어라 빨갰다. 사귀자고 했는데도 손 잡거나 뽀뽀하거나 하는 것은 일절 없었다. 이유담은 서한결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고 그건 서한결도 마찬가지였다.


- 어, 선배님······ 저 먼저 갈게요.
- 어 그래. 어. 잘 가.


정신 차려 보니 연무실엔 이유담 혼자 남아 있었다. 이유담은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서 있었다. 나중에 수근대는 소리가 들리길래 봤더니 중등반 애들이 문 앞에서 이유담을 바라보기만 하고 연무장에 못 들어오고 있길래 배려삼아 복도로 나와줬다. 중등반 애들은 이유담이 왜 저렇게 착해졌냐며 도로 수근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일 교시 수업은 이미 시작한 뒤였다.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강의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처맞았다.












서한결을 다시 보게 된 건 정확히 삼 일 뒤였다. 고등반 전체의 선택과목인 전쟁 언어와 이해 과목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이유담은 친구도 없어서 그냥 빈 자리에 앉았고 서한결 역시 쫄래쫄래 따라와선 이유담 옆에 앉았다. 둘 다 친구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유담은 말 없이 큰 맘 먹고 몰래 서한결 손을 잡았다. 서한결의 작은 몸이 움찔 떨렸다.


교관은 앞에서 전쟁 은어와 암구호들, 그리고 모스부호를 가르쳤다.


중등 과정에서 알파벳과 숫자의 모스부호는 이미 다 암기해뒀다. 이유담과 서한결은 알파벳보다 모스부호에 더 익숙했다. 사실 에이 비 씨는 쓸 줄도 몰랐다. 듣기로는 서한결이 왕국의 초등학교에서 복잡한 외국어 하나를 배우고 있다던데. 아마 한자라고 했던가.


我爱你


서한결이 이유담의 눈칠 보더니 책에 뭘 적어 슥 건넸다. 이유담은 글잔지 그림인지 싶은 문자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담을 모든 걸 아는 천재 정도로 여겼던 서한결은 다시 책을 가져가 글자를 벅벅 지우기 시작했다. 어째 진퇴양난이다. 서한결은 사랑한다는 스펠링을 몰랐고 이유담은 읽을 수 있는 문자라곤 영어와 숫자의 모스부호밖에 없었다.


그래서.


톡, 톡. 서한결이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부호임을 알아챈 이유담은 그 수를 읽기 시작했다.


··––– ––––– ––··· ···–– ––··· ····–


207374? 뭔 뜻이냐는 표정을 짓자 서한결이 귓속말했다.


- 왕국 학교에서 배워 온 은어예요. 그러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뜻.















그 목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했다. 처음으로 사랑한다 들었던 날이기 때문인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사랑한단 말 좀 많이 들어볼 걸 그랬다. 아무튼 사랑한단 말보단 암구호가 익숙했던 어린 이유담과 서한결은 그 이후로 207374를 둘만의 암구호 비슷한 것으로 정의해 버렸다.


서한결은 줄곧 조용했다. 가끔씩 밥때가 되면 먹을 걸 주는 것밖에 이유담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심심할 땐 철창 사이로 서한결과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하긴 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그 뒷 이야기는 별 거 없다. 잘 사귀던 아기 서한결은 어느 날 우연찮게 총감과 이유담의 뒷 대화를 엿들었다고 한다. 서한결 꼬시는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 왕국으로 귀화하지 않는 건 확실하냐, 어떻게 됐든 졸업 과제는 에이플을 주겠다. 서한결은 충격을 크게 받았고 그 다음 날 학교로 가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이유담의 에이플이 회수되는 것도 당연한 순리였다.


이유담은 미안하단 말 같은 거 할 줄 몰랐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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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쟁 중 왕국 시민들에게 구걸하여 배워 온 은어로 모스부호를 건넨다. 손가락으로 철창을 두드리는 명쾌한 소리가 울리고 서한결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뒷모습이 가련하여 안쓰러웠다.


서한결이 왕국으로 도망가고 이유담은 몇날 며칠을 앓았다. 처음에는 죽는 줄 알았다. 이렇게 사랑한 줄도 몰랐으면 서한결 그렇게 안 보냈다. 이유담은 서한결이 부대를 나선 뒤에야 진짜 사랑했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그렇게 뛰는데 몰랐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하여간 이유담은 그 이후로 사랑다운 사랑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쬐끄만 서한결이 어떻게 컸을지, 결국 왕국으로 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끔 그런 생각으로 시간 떼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유담은 말주변이 전혀 없었고. 미안해 같은 말 할 줄 몰랐고.


- 제국 지하수감소에서 왕국 포로가 대규모로 탈출했대!


뭐 그런 소식을 듣고 황급히 지하로 내려갔을 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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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비슷한 것으로 교묘하게 뚫어 놓은 듯한 휴지 조각만 남아 있는 걸 봤을 때에도.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원히 사랑해, 그런 뜻이었댔나.


이유담은 운명 따위 믿지 않는다. 영원히 사랑한단 말도 솔직히 지켜질지 잘 모르겠다. 서한결이 자길 얼만큼 사랑했건 간에, 그렇게 배신당했음에도 아직까지 사랑한단 말 남겨두고 갈 정도로 좋아했건 간에, 이유담이 서한결을 좋아하는 그 마음보다 크진 않을 것 같아서 이유담은 또 며칠동안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서한결과 이유담은 우연 따위 아닌 것 같아서.


영원히 사랑한단 말은 꼭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처럼 들렸다.













W 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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