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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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6 22:37조회 44댓글 0윤정하🪻
나는 뿌리로 시간을 느낀다.
땅속의 온도, 물이 스며드는 속도, 계절이 바뀔 때 흙이 내는 아주 작은 소리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걸 안다. 말은 없지만, 침묵은 나에게 언어다.
처음부터 나는 하얗게 태어나도록 정해져 있었다. 붉어질 수도, 노랗게 물들 수도 없는 색. 햇빛을 받아도 빛나기보다는 흡수하는 색. 그래서 나는 늘 주변의 색을 기억했다. 새벽의 회색, 비가 오기 전의 푸른 그림자, 눈이 녹을 때 남는 흐린 흰빛까지.
나는 다른 꽃들처럼 향을 크게 퍼뜨리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가도, 벌이 머물러도, 나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가만히 서서 흘러가는 모든 시간을 몸에 쌓아두었다. 꽃잎 한 장, 한 장이 지나간 계절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꽃잎 끝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비는 나를 씻어내는 동시에 더 희게 만들었다. 더러워질수록, 나는 오히려 더 하얘졌다. 세상이 나를 덮어도, 나는 그 위에 다시 나를 남겼다.
밤이 오면 나는 별을 보지 못한다. 대신 어둠을 느낀다. 어둠은 나에게 가장 솔직하다. 아무 색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 의미도 묻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밤에 가장 오래 깨어 있다. 시들어가는 꽃잎조차 밤에는 천천히 떨어진다.
나는 기다리지 않는다. 기다림은 목적이 있는 행위다. 돌아올 누군가, 도착할 무엇을 전제로 한다. 나는 그저 존재한다. 피어 있고, 피어 있었고, 피어 있을 것이다. 그 사이의 모든 순간을 흙과 공기에게 맡긴다.
그러나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 나는 안다. 나를 하얗게 만든 것이 단순한 색이 아니라는 걸. 수많은 지나침, 닿지 않음,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겹겹이 쌓여서 이 색이 되었다는 걸.
시들기 시작할 때조차 나는 조용하다. 꽃잎은 갈색으로 변하지 않는다. 투명해지듯 옅어지고, 빛을 통과시키며 사라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무언가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피지 않는다.
하지만 사라지지도 않는다.
흙 속에서, 남아 있는 기억처럼
백장미였던 시간은
아무 말 없이 계속 흰빛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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