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罹患):너라는 병에 걸려 기어이 앓기로 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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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우리를 실패한 문장이라 불렀고,
우리는 기꺼이 그 낙인을 완장처럼 차고 숲의 끝자락으로 숨어들었어.
낡은 보호소의 창가,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네가 물었지.
"왜 하필 나였어? 언니마저 무너뜨릴 게 뻔한 이 폐허 같은 삶을. 왜 언니는 기어이 고쳐 쓰려고 해?"
너는 찢긴 날개를 숨기려 하지도 않는 가련한 조신(鳥神)과도 같았어.
나는 그 떨리는 음절 끝에 맺힌 비릿한 고통을 가만히 응시하며 대답했지.
"고쳐 쓰려는 게 아니야. 단지 너라는 단어 옆에 내 이름을 나란히 적어 넣고 싶었을 뿐이지. 우리가 함께라면, 이 무너짐조차 하나의 아름다운 양식이 될 수 있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짓무른 상처에 입을 맞추며, 세상이 강요한 '성숙'이라는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어.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리는 밤, 네가 내 무릎에 머리를 뉘며 낮게 읊조리던 순간.
"내 안의 어둠이 언니의 빛을 잡아먹을까 봐 두려운걸..."
"그럼 같이 어두워지면 돼. 빛이 없어도 서로의 기척만으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밤의 어둠을 나는 사랑하니까."
너는 누군가에게 구걸하고 싶어 그토록 울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단 한 사람. 자신의 무너짐을 온전히 받아내 줄 단 한 줌의 온기가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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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놓인 식어버린 찻잔은 마치 우리의 정지된 시간처럼 고요하고, 우리가 나누는 밀어들은 미처 단어가 되지 못한 채 서로의 살갗 위로 녹아들 뿐이야.
하지만 그 침묵의 흔적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지문이라는 사실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밖으로 끌어내려 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애를 제멋대로 재단하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안개 자욱한 이 도피처에서 행복을 나누며 길을 잃는 일에 몰두해.
"이곳을 나가면, 사람들은 우리를 뭐라고 부를까?"
"상관없어. 네가 나를 '나'라고 부르고, 내가 너를 '나의 세계'라고 부르는 한, 그 어떤 이름도 우리를 가둘 수는 없으니까."
무모하게 맞잡은 이 손이 비록 우리를 벼랑 끝으로 인도할지라도, 네 목덜미에서 풍기는 서늘한 향기가 너무도 싱그러웠기에 나는 결코 이 손을 놓을 수 없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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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고도가 낮아지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오후가 오면, 나는 내 몸속에 남은 마지막 온기 한 조각까지 모두 끄집어내어 네 시린 발등을 적시고.
부서질 듯 찬란했던 그 고통의 조각들을 기억의 심연에 묻어둔 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세상의 소음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야.
누군가는 말하겠지.
이토록 지독한 몰입은 결국 소멸로 향하는 병적인 집착일 뿐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당당히 말할거야.
서로를 구원하며 흘렸던 그 수많은 눈물이 고인 바닥마다, 훗날 우리가 가장 추운 죽음의 계절을 지날 때 꺼내 먹을 단단한 영혼의 씨앗이 맺히고 있다는 것을.
비릿한 새벽 향기를 가슴에 품고, 서로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완성된 이 찰나의 구원을 영원히 사랑하기로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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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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