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텨야 하는 계절의 밤
[7화] 버텨야 하는 계절의 밤
어제의 그 시원한 기억은 뒤로하고 오늘의 해는 다시 또 떠버렸다.
독서실을 나오는데 비린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오늘 유독 공부 내용이 머릿속으로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시작부터 튕겨 나가서 종일 멍하게 앉아만 있었다.
습관적으로 그 골목으로 향했다.
담벼락 앞에 도착해 등을 기대고 앉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여름아, 자?"
벽 너머로 내 목소리를 던졌다. 작게 소곤거렸는데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답이 돌아왔다.
"안 자. 너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 다 들렸거든. 편의점 들렀다 오는 길이야?"
"어. 당 떨어져서. 비닐 소리가 들렸어?"
"응. 너 발 소리부터 다 티 나던걸."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와... 무섭네. 다음부턴 진짜 조심해서 걸어와야겠다."
"그러면 내가 너 못 알아보고 그냥 자버릴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담장 너머에서 여름이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까 종일 여러 문제들에 시달리느라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조금은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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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아, 근데 오늘 목소리가 좀 힘이 없네? 무슨 일 있어?"
"그냥... 맨날 똑같지 뭐. 단어는 안 외워지고, 모의고사 결과도 곧 나올 거고. 그냥 좀... 지루해서."
"지루한 것도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난 매일 방구석에서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복잡한 머릿속을 다시 정리하는 한 줄기 빛이 되어줄지도 모르지."
여름이의 말투는 늘 이런 식이다.
거창한 위로를 건네는 것도 아닌데, 차분하게 던지는 한마디에 마음이 툭 가벼워지곤 했다.
"여름아."
"응."
"너는 하루 종일 집에서 뭐 해? 안 심심해?"
"나? 심심할 틈도 없어. 나도 내 공간 안에서 할 일로 하루가 가득 차 있거든. 아, 맞다. 책 정리하다가 책상 구석에서 뭐 하나 발견했거든. 너 주려고 담장 틈에 놔뒀어."
담벼락 틈새에 끼워져 있는 무언가를 바로 찾았다. 제안: 크기는 작았지만 어디 있는지 한눈에 보여 바로 꺼내어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책갈피. 전에 만든 건데 너 쓰면 좋을 것 같아서. 공부할 때 책에 끼워둬도 되고."
코팅지 안에는 말린 연분홍빛 꽃 한 송이가 들어 있었다. 코 끝을 대니 아주 연하게 풀 냄새 같은 게 났다.
"이거 무슨 꽃이야?"
"글쎄, 나도 이름은 잘 몰라. 그냥 누가 주길래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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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책갈피를 손끝으로 살살 만지작거리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은 문제집을 펼쳐도 글자가 다 검은 찌꺼기처럼 보여. 내가 뭘 위해서 이렇게 붙잡고 있나 싶고..."
담장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그 이후, 여름이는 조용히 내 푸념을 눌러 담아주듯 따뜻하고 묵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진득하고 꾸덕한 절망의 늪에 발이 묶여도 괜찮아. 이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차분하게 널 감싸줄 깊은 가을이 찾아오는 것처럼. 너한테도 분명히 찾아올 테니까."
그저 나를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건네는 말 같았다. 오글거리거나 마음을 빗겨 나가지 않고,
가슴속 제일 깊은 곳에 스며들어 묵직하게 자리를 잡았다.
신기하게도 답답했던 가슴 한구석이 서서히 메워지는 기분이었다.
"고마워. 이건 꼭 문제집에 끼워 둘게."
나는 교복 주머니 속으로 책갈피를 슬쩍 살포시 넣고 쥐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밤공기가 아까보다 훨씬 덜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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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어귀를 빠져나오는 길,
낮만큼은 아니어도 담장 너머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여전히 매미 몇 마리가 밤을 잊은 채 야위어가듯 울어대고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짓짓 울어대는 그 소리가 오늘따라 그렇게 헛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열기가 쉽게 식지 않는 이 여름의 밤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숨을 내쉬며 계절을 견뎌내는 존재들이 있었다.
담장 너머에서 나를 따스하게 다독여주던 여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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