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공백 ⁰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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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9 17:33조회 56댓글 2일유헌
마츠모토시를 포함한 일본 전역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아련한 여름날 따위는 잊어버리기 직전이었다.

나는 녹슨 자전거를 뒤로하고, 가득 차 무거워져 버린 까만 백팩을 맨 채 밖을 나섰다. 아스팔트 위 발목 언저리까지 차오른 눈은 그저 내딛는 발걸음을 방해할 뿐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는 코끝이 찡해지는 추위가 지속됐다. 곧 내 육체로부터 반경 30미터 이내에 낡은 표지판이 들어찼고, 파란 버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나는 정리권을 하나 뽑아 차가운 버스 시트 위에 앉았다. 두꺼운 점퍼 주머니에 잔뜩 구겨진 천 엔과 작은 노트가 손에 잡혔다. 아마 노트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나의 청춘이 넘친 장소가 여럿 적혀있을 터였다. 덜컹이는 버스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외롭다ー

캄캄한 시야 때문일까, 온 신경은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에 집중되었다. 나는 귀에 대충 꽂아놓은 이어폰의 음악 소리를 최대치로 올렸다. 머릿속은 미치도록 복잡했다.

3주 전, 낡은 서랍에 박혀있던 고등학생 시절쯤의 노트를 발견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달큰한 추억에 취해 첫 장을 펼쳐봤을 때였고, 그 종이 위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렇게 적혀있었다.


ー 친애하는 소우에게

오히메키 고교에서의 첫날은 무척이나 즐거웠어. 아마 상냥한 날씨와 소우의 덕이 가장 컸기 때문이었겠지. 이 편지는 내일 해질녘 쯤에야 전해지겠네. 가을의 바람이 소우에게도 닿기를 바라.

                               2018년 9월 21일 ー 요네하라 사아야

요네하라 사아야. 분명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게 익숙하고도 그리웠다. 애당초 저 노트는 수학 개념 정리용이 아니었나? 나는 유독 흐릿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몇 번이고 재생하고 있었다.

2018년 9월에서 12월 사이는 흐릿했다. 마치 시간에 공백이라도 생긴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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