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2 23:39•조회 29•댓글 3•이다음
다음역은 –역입니다.
안내 음성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하철은 웅웅 소리를 내며 출발한다. 나는 참아왔던 옅은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본다.
벽 곳곳에 있는 형형색색의 그래피티. 정체 모를 얼룩들로 붉게 물든 좌석들. 한마디로 무법지대와 다름이 없는 곳이다.
괜히 씁쓸해진다. 저 텅빈 좌석들이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지는 이미지를 그린다. 빽빽하게 엉켜있는 몸뚱아리들, 고요한 북적임— 더이상은 볼 수 없겠지만.
창문 밖의 풍경들이 빠르게 바뀐다. 마치 파노라마 같다. 아, 주마등같기도 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네 얼굴을 바라본다. 그러곤 손으로 상처가 난 네 눈가 주위를 주위를 쓸어내린다. 할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 붉은색의 혈흔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어쩐지 자괴감이 든다.
내가 조금만 더 너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 상처는 네게 없었을까. 커다란 죄책감이 마음 한 가운데를 턱 막아버린 것 같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깊은 잠에 빠져있는 네 모습은 한없이 평화롭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앞으로도 이처럼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 생각하곤 했다. 지금처럼 인간성이 메마른 시대에, 과연 생존은 의미가 있는가? 살아있다 한들 그것을 정말 살아있다 볼 수 있나. 그런 의문이 들때마다 아무리 파고 또 파고들어도 내 답은 너, 언제나 너였다. 내 삶은 오로지 너를 지키기 위해 연장된다. 너는 나의 생이다.
나도 스르르 눈을 감는다. 도착역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그때까지만이라도 체력을 보충해둬야한다. 지하철에서 내리면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까.
네 손을 단단히 잡는다. 어쩌면 이건 신께 드리는 마지막 기도다. 부디 앞길을 밝게 하소서. 나의 생을 살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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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다른 플랫폼에 올렸던 단편의 수정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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