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개화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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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4 01:13조회 98댓글 1일유헌
아침.
겨울의 아침.

붉은 홍실이 묶인 새끼손가락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바라보고.

따뜻한 머그잔 하나를 손에 쥐고서
오늘도 내다본 창밖은 소복이 쌓인 겨울.



숨을 들이켰다.



겨울 위에 덮인 위화감.
무언가 달라졌다.



바삐 움직이는 동공.
손 끝에 들어가는 힘.



유리창 너머로 느껴지는 한기.









그리고



그 끝에는













발자국.













팽창하는 겨울과

누군가의 흔적.



선명하게 짓밟힌 눈.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눈동자의 패닉.



지직거리는 기계음.
또다시 에러?



울리는 머릿속.



ー 아···.


누가 있나?
우연뿐만이 아닌 또 다른 새벽이 있나?
만날 수 있을까?

만나고 싶다.





아 어떡해.

세상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나 봅니다.

.
.
.

고민했다.
도서화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 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필연이라 믿었다.

아무리 우연이라 우길지언정
결국은 만나게 될 필연.

필연이다.
도서화는 그렇게 믿는다.


우연도 정해진 필연.
지독한 필연론자.



흐린하늘도시린바다도내리는폭설도헤진분홍목도리도끝없는겨울도약지에껴져있는은반지도낡아버린필름카메라도그리고또이새벽까지도


필연인 것이다.


이 겨울 새벽의 누군가는
발자국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도시 위로 쭉 뻗은 도서화의 손 끝에는
김 서린 유리창이 닿았다.





새벽을


만나러 가자.





둘뿐만이었던 도시를 잊어버릴까.
필연이 아니라면 만날 수 없었던.












영하 삼십이도.

낡아빠진 온도계는 아직도 멀쩡히 작동했다.



오늘은 꽤 춥다.



잿빛 목도리를 매고
커다란 백팩을 등에 진 채.



닫혀있는 방문에 흰 손의 마디가 부딪혀.


딱딱한 마찰음.



ー 자?


답이 되돌아오지 않을 건 알고 있었다.


ー ···잠깐 나갔다 올게.




새벽을 만나러 갈게. 돌아올 거야.







차마 내뱉을 수 없었어.







널브러진 도로 표지판.
가로등 불빛이 어슴푸레 깜빡였다.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내리는 겨울에 덮여
희미해지기 전에 서둘러야 할 텐데.

무작정 발자국을 따라 새벽을 만나겠다는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해봤자

이 도시는 넓고
필연이든 우연이든 알 수가 없으니
다 부질 없을 걸 안다.



도서화가 이 겨울에서 길을 잃으면
선우연은 혼자 남을 거야.




혼자 남겨버리면 어떡하지?




도서화는 발을 멈춰 세웠다.

마지막으로 본 선우연의 분홍 목도리가
희미하게 기억을 메꿨다.

우습게도 선우연을 떠올린 순간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의미가 있나?




아무리 두 눈 씻고 찾아봐도 답이 없다.

애초에 이 도시에서 정답을 찾는 게 더 이상했다.
태어나자마자 운명 통지서라도 보내주면 좋을 것을.

한 치 앞을 모르는 겨울에는
죽음이 머물다 가기 일쑤다.

괜찮을까라며 자신에게 수천만 번쯤 질문을 던져도
결국 답은 없어서 항상 절망에 빠진다.


우연하게 다가오는 구원을 상상했다.


상상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힘 없이 깜빡이는 전등과 같다.

머지않아 그게 존재한다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구원을 너무 믿지는 마.



.
.
.


확실히 추웠다.

눈이 내려 발자국은 점점 희미해지는데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리던 눈은 그쳤건만, 기온은 점점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마주했다.


흐린 구름을 뚫고 석양이 피는 하늘.



새벽의 목적지는 도대체 어디일까.

목적이나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서
오로지 이 새벽을 만나야겠다는 마음.

붉어져 버린 피부.
돌아가는 길은 외웠다.



혼자 두지 않을 거고,
만날 수 있어.



이어진 발자국을 쭉 짓밟다 보면 분명.



새벽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새벽을 만나고 나서는 곧장 선우연에게로 돌아가자.

오래도록 떠올렸던 겨울과 사람.
그 새벽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으면 해.



만나러 갈게.



우리 살아남자.



봄날인지 뭔지를 마주할 수 있을지는 모른대도
충동적인 겨울을 굳이 말리지 않는다.


모 아니면 도.



얼마나 걸었을까.
조급한 발자국이 끊겼다.

고개를 들어보니
투명하고 검은 눈동자가 도서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발자국의 주인.

붉어진 뺨과 코 끝에 닿는 머리칼.
백옥과 닮은 흰 피부.

우습게도 그 새벽을 처음 본 순간

도서화가 한 생각은


마냥 새벽이 예쁘다고.



ー 우와, 누구예요? 저 말고 다른 사람 처음 봐요!



새벽은 순수했다.


아무 별도 떠오르지 않은 순수한 새벽은
손을 한 번 쥐었다 피면 전부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아 결국 의미는 있었다.

만났다.


그럼 됐나.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다급해하지 말자.


입술의 떨리는 움직임.


ー 아, 그, 저는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ー 그래서 발자국을 잇따른 거예요?

ー 알고 있었어요?





ー 응!



정말이지 특이한 사람이었다.


자연스레 도서화를 이끌고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게 한없이 장난스러웠다.



ー 혼자 살아?

ー 한 명 같이 사는 애 있어요.

ー 나까지 하면 이제 세 명이네.



넉살도 좋지.



ー 아참. 이름은 뭐야?

ー 도서화예요. 같이 사는 애는 선우연.

ー 내 이름은 한새벽! 잘 부탁해.



흰 피부에 남은 상처가 눈에 띄었다.

막무가내로 한 악수.
사람의 손은 이리도 따뜻했다.

이름과는 정반대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어두운 새벽보다는
뜨거운 태양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오로지 도서화한테만큼은 태양이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커다란 태양.


ー 몇 살이야?

ー 스물 여섯이에요.

ー 어리구나···. 난 서른 셋. 내가 형이야.



한새벽의 입은 쉴 틈도 보이지 않았다.

아, 처음 만난 사람이랑은 이렇게 얘기하는구나.
얼마 만이지.

기억을 더듬었다.

선우연을 만난 지는 7년.
그러니까 대략 7년 만에 사람이었다.

정말 사람이 살긴 했다.

이제 도시는 둘이 아니라 셋이다.

도서화는 그 도시에
영원히 둘뿐만일 것만 같다 생각했다.

정말 세 명.
역시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선우연에게는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까.

한새벽이 발자국을 남긴 우연으로부터
필연이 이어졌다.

존재하지 않을 거 같던 한 명은 지금 도서화의 옆에 있다.
예쁘게 눈꼬리를 휘며 웃는 새벽.



ー 선우연은 어떤 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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