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U
* 아련 : 어리고 아름다운.
아련하다 : 똑똑히 분간하기 힘들게 어렴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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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은 건 화요일인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책들 사이에 쌓인 먼지 만도 못한 인생, 서리보다도 끈끈하지 못한 인생이었다.
죽고나서 처음 한 일은, 내 자리의 의자를 바깥으로 조금 비스듬히 빼는 것이었다.
우리 집 단 네 개의 의자 중 내가 사용해온 건 오직 하나. 내가 앉던 자리는 오래전에 눌린 흔적으로만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나머지 세 개의 의자는 여전히 아무도 아닌 것들의 몫이었다.
한때는, 그 세 개의 의자 위에 먹던 석류 알들을 흩뿌린 적이 있다. 살아도 살아도 진한 흔적하나 못 남긴 내가 안쓰러워서. 그날 따라 붉은 즙이 천천히 방석을 거쳐 나무 다리 속 틈으로 스며들었고, 나는 그 얼룩이 마르기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노을이 하늘을 죽이고 있었다. 초록빛 유리막을 뚫고 이쪽으로 번져오는 붉은 노을은, 마치 하늘이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는 듯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종의 자기혐오적 공포였다. 나는 그 붉은빛 앞에서, 내 안에 숨겨진 모든 실패와 부끄러움이 검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나는 하루를 더 열심히 살지 못했다는 고해를 토해낸다.
죽은 뒤의 나는 이제 그런 고해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뭔가 오만해진 느낌이였다.
마치 뿌리깊게 내려앉았던 슬픔까지도 액자 속 압화처럼 벽 한 켠에 걸어둔 채, 더 이상 쳐다보지 않는 사람처럼.
그러나 오만은 곧 깨진다.
책상 위로 미세한 바람결이 스치더니, 내가 마지막으로 써 두었던 문장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집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기척을 알아채자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혹시 본인 맞으실까요?
정중한 태도의 양복입은 남자였다. 검은 넥타이에 은색 핀을 꽂고 있었고, 양쪽 눈썹 사이의 주름이 인위적으로 지워진 것처럼 매끈했다.
그는 마치 이곳이 자기 사무실인 것처럼 방 안을 둘러보더니, 어디에도 앉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 조금 늦었습니다. 겨울이라 그런지 일이 좀 많아서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나는 그가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쓴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신은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있고, 어떻게 날 볼 수 있는지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 저는 수거자입니다. 영혼의 무게를 조율하고, 정리가 끝난 분들을 모시는 일을 하죠. 옛날 영화나 책에서 보면 죽은 영혼들이 저절로 하늘로 올라가죠? 그게 정상적인 영혼이 승천하는 방식이예요.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무거워진 영혼은 제가 직접 무게를 조율하고 올려보내야해요
잠시의 침묵 후.
* 제가 왜 무거운거죠?
내 물음에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수거자가 웃음기를 뺀 얼굴을 내 앞에 내민 채 입을 열었다.
* 본인은 이미 알고있잖아요. 삶에 아련함이 남아있으시니까요.
그 순간, 창밖의 어둠이 방 안으로 스며들듯 마음 깊은 곳까지 흘러들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은 말라붙었고, 생각은 구체를 가지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한 아련이라는 단어가 나의 등을 조금 더 숙이게 만들었다는 걸.
* 가장 답답한 곳이 어디예요?
그가 다시 웃음기를 띤 얼굴로 가방을 열며 어깨 넘어로 물었다나는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가슴을 짚었다.
* 여기요.
그가 톱을 들고 내 몸에 커다란 구멍을 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톱에 맞춰 내 몸체도 흔들리는 것이 내게 우울한 기시감을 주었다.
*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저희도 어찌할수가 없어서요. 영혼의 한을 풀어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요.
그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침묵으로 그 말을 들었고, 마치 무거운 굴레가 점점 더 단단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호두알이 생각났다.
단단한 껍질 속에 오래도록 감춰진, 깨지기 어려운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통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 그것들은 잘린 저 것에 있으니까. 이제 나는 가볍고, 한도 없다. 딱 재활용하기 전 페트병이 된 기분이였다. 내 몸체 한가운데에 뚫린 이 구멍은 살아있었던 시절 내 몸체의 공허를 시각화한 것만 같았다. 손으로 부끄러운 그 구멍을 가렸다.
무언가로 채워질 기회도 없이 비워진 채로, 그렇게 오래 살아왔다.
말없이 삼키던 슬픔들은 나를 닮아, 말라붙은 먼지처럼 몸 속에 겹겹이 쌓였다.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고요하게 부서지는 존재에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었다면... 삶이라는 밀물은 어느 날 갑자기 빠져나갔고, 남은 건 염분 가득한 모래알들뿐이다. 바닷물이 빠진 뒤 거품과 해초가 곳곳에 흩뿌려진 모래바닥은, 갈수록 더 단단해지고-
* 왜 다시 무거워지는거지?
수거자의 당황한듯한 말에 나는 내 아래를 보았다. 발목까지 바닥에 잠겨있었다. 수거자는 인내심을 잃은 듯 했다. 그가 다시 거칠게 가방을 풀더니, 이번에는 칼을 꺼냈다.
** 써걱, 써걱
이내 갈고리가 내 머리에 거칠게 박혔다. 꼭 낚시꾼에게 잡혀 수면 위로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위로 올라갈수록 숨이 점점 얕아지고,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하나씩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 나는 어디로 가나요?
내가 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일종의 마지막 친절같았다. 올라갈수록 몸 전체가 서서히 질식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땐, 햇빛이 그 모든 기억을 지워내려는 듯 설익은 금빛으로 잘린 발목 아래의 풍경을 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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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리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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