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발자국 上

설정
2025-09-13 21:15조회 241댓글 15익애
희끄무레한 안개가 발목을 감싸고, 어렴풋이 들려오는 물소리는 먼바다의 울음 같았다. 나는 이제 그가 없는 세상에서 아주 오래도록 홀로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그의 잔상 하나 남기지 않고, 이름마저 희미해진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었다고. 그러다, 길 위에서 멈춰 섰다. 내 발자국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사라지는 발자국. 아, 내가 정말로 죽었구나. 이제는 그에게로 돌아갈 일도, 그를 만날 일도 없겠구나. 마지막 생각마저 그였다는 것에 쓰게 웃었다.

그녀는 습하디 습한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애써 잊으려 발버둥 치며 살았던 시간들. 그와의 추억이 재가 되도록 지워내고 또 지워냈었다. 하지만 죽음은 삶이 남긴 모든 잔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에게 잔인한 진실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를 잊은 줄 알았는데. 포기한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죽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이 쓰라린 사실에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숨조차 쉬어지지 않는 몸이건만, 심장이 죄어오는 고통은 왜 이리 선명한가.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진주 같은 눈물들을 뚝뚝 떨어뜨렸다. 투명한 눈물 방울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때였다. 귓가에 차가운 정적을 깨고, 어딘가에서 풀잎을 밟는 나긋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서늘하지만 익숙한 발걸음 소리. 심장이 다시 쿵 하고 내려앉는 착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러나 애써 그 가능성을 부정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그와 똑같은 얼굴의 존재가. 생기 없는 회색빛 안개가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주변을 유영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빛을 삼킨 듯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얼굴만은 생전에 보던 그대로였다. 웃음기 없는 창백한 표정, 하지만 어쩐지 슬픔이 어려 있는 눈매, 단단하지만 여전히 상냥해 보이는 입술. 아, 그 모든 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였다. 내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했고, 죽음 너머에서도 마주하고 싶었던 단 한 사람.

그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애써 감춰왔던 눈물의 흔적을, 그 어여쁜 손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준다. 차가운 온기가 뺨에 스쳤지만 나는 그 손길이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왜. 왜 그가 여기 있는 건데.
난, 죽었잖아.

그의 눈동자 속에서, 그의 모습으로 나타난 저승사자의 눈빛 속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연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연민의 끝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애달픈 사랑이 담겨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를 사랑한다는 자각을 뒤늦게 해버렸다.

그의 모습을 한 저승사자님이,

나를 이승에서 데려가지 못해,

아 어쩌면 나를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해,

고통스럽게 눈물을 홀리는 것을 보니.

나는 이제 완전히 끝났구나.

아니, 우리는 이제 완전히 끝났구나.

**

나는 그 차가운 손에 기댈 수도, 뜨거운 사랑을 속삭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나를 데리러 온 망자의 안내자일 뿐.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한 채 망자에게 나타나 저승으로 인도하는 존재. 하지만 그 슬픈 눈빛은, 마치 자신 또한 영원한 이별의 고통 속에 있는 듯했다.

내 사라지는 발자국 뒤로,

차마 데려가지 못하고 서성이는 그의 그림자가 흐릿하게 겹쳐졌다.




✒ || 익애 ||
망자를 데려가는 저승사자는 그 망자의 이상형인 모습으로 찾아온다

https://curious.quizby.me/K2pq…

+ _ 0806 올렸던 글 - 0913 백업 _
下편 남아있습니다 ෆ.
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