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

설정
2025-08-07 19:54조회 28댓글 4drizzle
그의 눈은 이제 나의 우주가 아니었다. 내가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존재를 확인하던 시절은 끝났다. 거울 속의 나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거울을 깨고 싶었다. 그 안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내게 그의 존재는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이 곧 나를 정의했다. 그런데 그는 그 믿음을 거두었다. 나는 이제 누구인가. 나의 이름은 무엇인가. 나의 존재는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이 모든 질문들이 뼛속까지 시린 바람처럼 나를 스쳤다.


나는 그의 부재를 온몸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그의 부재는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모든 감각을 잠식하는 거대한 허무였다. 그의 향기가 사라진 방, 그의 온기가 없는 이불,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적. 이 모든 부재는 나의 존재를 지워나가는 작업이었다. 나는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나의 집착은 마지막 기억에 대한 나의 투쟁이었다. 나는 우리의 사랑이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지키려 했다. 그가 나를 사랑했던 순간들, 나의 손을 잡았던 순간들, 나를 보며 웃었던 순간들. 그것들이 모두 환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려 했다.


나는 그의 집 문 앞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의 집은 닫힌 관념이었다. 한때는 나의 것이었던 그 문이, 이제는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의 시간은 멈추었다. 나의 세상은 그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의 미소는 이제 미지의 세계에 속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미소를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나누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것은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나의 세상 밖으로 걸어나갔고, 나는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사랑의 끝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마주하고 있다. 그것은 차갑고, 고요하고, 절대적인 단절이었다. 나는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나의 영혼은 아직도 그 관념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 공허함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마지막 감정의 파편을 붙들고,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개인 ) https://curious.quizby.me/driz…
단편 모음 ) https://curious.quizby.me/driz…
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