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별을 마주했다. 그 속에서 나는 소중한 인연을 찾았다. 지금 내 남자친구, 유윤.
윤은 언제나 날 위했다. 가끔씩 추적이는 비에 젖어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올 때면 내게로 달려와 따뜻한 차를 끓여주곤 했으니.
나는 그 차의 알 수 없는 씁쓸함과 비릿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좀 다르지 않나?"
"응. 더 씁쓸해."
"괜찮아?"
"좋은데."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다지 길지도 않은 대화가 끝나면 서로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게 우리만의 암묵적인 룰과도 같았다.
그런데 윤과 함께할 수록 느꼈던 것이지만 눈에서 이물감이 자꾸만 든다. 처음엔 별거 아니라고 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물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눈을 비비면 좀 나아질까 싶어 손을 눈에 가져다대는 순간, 이명이 들렸다.
삐—
하고 큰 소리가 들리더니 낯설지 않은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귀 속으로 들려왔다. 분명 밖에서가 아닌 안에서 말하는 소리였다.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게 웅얼거리다, 이내 한국어로 귓 속에서 속삭였다.
"눈 비비지 마! 어지러워."
목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그 누구도 없었다. 그럼, 내 안에? 서서히 거울 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두려워졌다. 심장이 뛰는 소리와 함께 한 쪽눈의 시야만 흐려졌다. 그리고 거울 속 나의 흐린 눈에는...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네 눈 속 사람이지. 안보여?"
그 존재는 끝없이 조잘거렸다. 눈물이 쌓여 생긴 존재, 울음을 삼킨 끝에 만들어진 잔해, 네가 내 재료를 제공했다며.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네가 좋아하는 그 차. 그게 바로 날 키운 거야."
차라면 유윤이 준 거 밖에 없는데.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그 사람이 날 죽이려 했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결국 이 사랑 또한 수많은 이별 중 하나겠구나.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이 내 목숨을 가져가길 바랐다. 그의 손에서 끝나는 삶이라면, 그것조차 축복이라 믿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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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존재'가 홍채만큼이나 커졌을 무렵, 이젠 눈 속 다른 공간으로 숨더라도 이물감이 너무 커져 숨길 수 없었고 나올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더 이상 나는 '존재'를 가리지 않았다. 가릴 수도 없었다. '존재'를 보인채로 윤의 앞에 섰다.
"네가 만든거지? 이거."
"아, 그거? ...그냥. 너에게 나밖에 없었음해서."
잔인한 고백이였다. 이제 이 사랑이 막을 내릴 때가 왔음을 체감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그를 보고 나는 정상의 사람이였다면 그로부터 진작 도망쳐야 했다. 나는 이미 그를 미치도록 사랑한다. 내 목숨을 바치는게 당연할만큼.
"...차라도 줄까?"
"응."
그의 물음은 "죽여도 될까?" 와도 같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였다.
"마셔."
붉은빛이 도는 차, 하얀 잔.
따뜻한 액체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자, 아까 전까지만 해도 찻잔을 들고 있던 내 손이 살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핏덩이가 꿈틀대다, 곧 괴사하여 검붉은 액체로 변해 흘러내렸다.
피부는 썩어버린 과일처럼 갈라지고, 몸속 장기는 차례로 무너졌다. 그러나 공포보다는 평온이 앞섰다. 우리의 사랑이 내 살을 먹어치우는 순간, 나는 그를 한층 더 가까이 느꼈다.
귓속에서 존재가 속삭였다.
"고마워. 이제 내가 나갈 수 있어."
시야가 흐려졌다. 눈이 터져 흘러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그의 얼굴만을 찾았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게 준 것은 사랑이 아닌 죽음이였으나 나는 내 심장을 녹게 한 그것 또한 사랑이라 믿기로 했다.
우린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랑을 한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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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8
By. 유하계
16청춘 쓰기가 귀찮네요... 허허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시간나면 소설 쓰는 걸 먼저 하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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