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의 새장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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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31 21:07조회 55댓글 1필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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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태양은 흐릿한 구름 사이로 겨우 빛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마차 창을 통해, 낡은 돌길을 따라가는 마차의 바퀴를 멍하니 응시했다. 길 양옆으로 줄지어 선 늙은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한 속삭임을 흘려 보냈다. 오래된 학교 건물은 잿빛 하늘 아래서 더욱 어두워 보였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고딕풍 석조 건물이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사립 벨브룩 기숙 학교. 귀족 자제들을 위한, 오랜 전통을 유지하며 이름을 날리는 곳이라 근방에서 그 소문도 자자했다. 거대한 돌담과 펄로 된 육중한 문 사이로, 검은색의 고급 소재로 만든 교복을 입은 학생 몇몇이 수업이 끝난 교실에서 수다스러운 소리를 퍼뜨리며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서로 웃고 떠들며 달려가더라도, 품위는 여전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정차하자, 잠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파우스트는 금빛 눈동자와 함께 학교의 외관을 유심히 훑었다. 마치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건물에 내심 입을 다물기 힘들었다. 오래되었지만 결코 낡은 느낌이 들지 않는 석고로 된 벽, 길게 뻗어있는 창문과 뽀족하게 솟은 지붕, 건물에 화려함을 더하는 금속 장식까지.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파우스트의 눈에는 한치의 기대와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무심한 태도는 편입생이 아닌 재학생이라고 오해하게 할 법 했다.

파우스트가 학교 마당에 발을 들이자, 주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그것은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이 아니나 낯설고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그 자체였다. 파우스트의 청록 머리칼과 고고한 분위기, 그리고 어딘가 무관심하고 단단한 눈빛은 다른 학생들과 유독히 달라보였다. 그는 여러 의미로 평범한 학생들과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는 남들과 다르게 길들었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둘렀다. 그것을 단번에 눈치챈 학생들은 마치 감염될 것을 두려워하는 듯 거리 를 두며 속삭이며 바라보는 시선마저 따끔히 느껴졌다.

- 자네가 새 편입생이군.

흑색 옷을 입은 사감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감이라는 위치에 있음에도, 그는 긴장한 듯 딱딱한 태도를 보였다. 사감은 한 손에 작은 석판을 들고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 이쪽으로, 교장실에서 간단한 면담과 편입 절차를 밟을 것이네.

사감은 파우스트를 기다란 복도 끝 교장실로 안내했다. 복도는 빛이 희미했고, 끝도 없이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 벽에는 오래된 초상화가 수없이 걸려있었다. 초상화의 눈동자는 파우스트가 움직일 때마다 그를 따라오는 듯한 착각이 일도록 했다. 파우스트가 초상화를 살펴보기도 전에, 교장실의 문은 한 뼘 열려버렸다.

교장은 서류와 책으로 가득한, 다소 권위적으로 보이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먼지 쌓인 서류들 사이로, 나이가 상당하지만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벨 브룩 기숙 학교의 교장- 알렉산더 블레이크 경만이 우뚝 보였다.

- 파우스트, 자네 이름을 편지에서 읽었을 때 상당히 놀랐네.

교장이 손깍지를 끼어 더부룩한 수염 사이로 문장들을 내뱉었다.

- 그 악명 높은 파우스트 백작 부부께서 편입을 요구하실 줄이야. 도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자넬 여기 맡기려는 건지 모르겠군.

- 겉치레는 됐습니다, 교장 선생님.

파우스트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교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파우스트, 자네가 이곳에 오기 전에는 어떤 생활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학교에는 규율이라는 것이 있네. 자네 가문도 과거 이곳에서 규율을 따르며 명예를 지켰지. 하지만 자네의 지금 태도로 봐선, 그 명예를 실추시킬까 봐 두렵군.

파우스트는 대답하지 않고 작게 미소지었다. 교장은 그에게 문서를 한 장 내밀며 마저 말을 이었다.

- 그곳에 서명하면 자네도 우리 벨브룩 기숙 학교의 일원이 되는 것일세. 만약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면, –

파우스트는 망설임 없이 펜을 집어 들어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로 S. 파우스트, 의 필기체가 종이 위에 미끄러지듯이 나타났다.

- ... 파우스트 군. 교수나 학생들 사이에서 자네 이름이 오르내리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걸세. 학교에서 스스로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건 위험해.

- 여부가 있겠습니까.

파우스트는 짧게 묵례하고 교장실을 걸어 나갔다. 블레이크 교장은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기숙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학생이라고 그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하던가, 안타깝게도 블레이크 교장의 소원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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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가 편입생으로서 첫 등교를 한 날, 사방에서 그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폐쇄된 기숙 학교라는 특성상, 편입생은 그리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도 상급생이 편입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미 기숙사 내에서 위계질서가 잡히고, 서열과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는 곳에 상급생이 새로 들어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현재 파우스트는 이방인. 어쩌면 하급생보다 더 서열이 낮을 수 있었다. 파우스트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학생 몇몇은 대놓고 키득거리며 그를 지나쳤다.

- 편입생, 밤에는 돌아다니지 마. 가끔 이상한 것들이 나타난대.

- 네 기숙사가 오르페움이지?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이 있다는 것 알아? 죽기 전에 흑색 옷을 입은 사람의 환각을 마주했대.

- 오르페움 1인실이라,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한걸.

학생들은 파우스트를 마주칠 때마다 학교의 흉흉한 소문들을 하나씩 던져주었다. 이방인을 겁먹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아직 아무 정보 없는 장소에 대한 괴담이다. 그들은 파우스트의 곁에서 그가 반응하길 기다리며, 기대에 찬 눈을 보여냈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그들의 말을 전부 무시하려다 이내 생각을 멈추었다. 그는 다가오는 사람을 전부 투명한 존재로 취급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자신을 고립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혼자가 편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학생들이 좋게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파우스트에게 접근한 학생들은 그의 태도에 불쾌함을 느꼈다. 오후가 되자 파우스트의 평판은 바닥을 달리고 있었다.

- 이방인이 벌써 잘난 척이라고 소문이 자자해.

오르페움 기숙사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파우스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느슨한 교복 차림의 상급생들이었다. 그들의 눈이 젊음과 장난기로 반짝거렸지만, 날카로운 의도를 품고 있었음이 전부 유리처럼 비쳤다. 학생들은 사냥감을 앞에 둔 하이에나처럼,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파우스트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학생 하나하나를 향해 찬찬히 고정됨을 느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그는 그들에게 반응 할 필요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무 말도 안 하네? 왜, 부모에 관해 물어볼까 봐 겁나?

학생 하나가 파우스트의 어깨를 밀쳤으나 결국 밀쳐진 것은 상급 학생 자신이었다. 상급생치고 작은 체구와 온실 속 화초처럼 보이는 인상. 그런 파우스트가 만만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그냥 궁금했어. 네 아버지가 사교계에서 추문을 일으켰다는 게 진짜인지. 그런 불명예스러운 일을 겪은 가문이 뻔뻔하게도 명예를 중시하는 학교에 자식을 보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거든. 네가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네.

학생들이 키득거리며 파우스트를 비웃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 않은 채 바닥을 내려보았다.

- 맞아.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

- 그야, –

학생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파우스트의 손이 절로 상급생의 뺨으로 향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고, 곧 불꽃이 튀었다. 찰싹 소리와 함께 학생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멍하니 서 있다가 파우스트의 옷깃을 다급히 붙잡았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소란이 커지자 학생들이 근처에 점점 모여들며 웅성거렸다.

파우스트는 그 모든 소란이 희미한 소음처럼 들렸다. 학생의 주먹이 그의 입술을 팡,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에게 싸움의 목적은 승리가 아님을,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기 위한 도구임을. 그럼으로서 파우스트는 비로소 살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그 모든 혼돈 속에서, 순간적으로 기묘한 감각이 스쳤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들어 올린 채 멈춰 서 있던 파우스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은 벽난로의 구석. 그곳엔 아무도 없어야 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거기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시선이 아니었다. 날카롭지도, 거칠지도, 친근하지도 않았다. 그 시선은 그림자처럼, 또는 얼음장처럼 스산함이 감돌았다. 그러나 지금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장작이 타들어 가며 불꽃을 일렁거릴 뿐. 그는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있었다. 거친 숨이 가라앉을 무렵, 누군가 팔을 잡아 이끌었다.

- 그만둬라, 파우스트. 체벌실에 끌려가고 싶어?

기숙사장이었다. 파우스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자신을 붙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느낌과 안도감이 전신을 맴돌았다. 주변에서 학생들의 소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싸움이 끝나버린 혼돈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벽난로 쪽을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제 그림자도, 시선도. 그 어떤 존재 뿌리의 근본도, 형체도 보이지 않은 채 공기만 그 주변을 감싸돌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손에 힘을 풀었고, 시비가 붙었던 학생은 바닥과 무릎을 맞추었다. 그의 코에서는 흥건한 양의 피가 흐르고 있는 중이었다.

- 공용 장소에서 싸움을 하다니... 오늘이 첫날이라 경고로 끝나는 줄 알아라. 하지만 다음부터는 바로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것이 좋을 거다.

기숙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우스트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기숙사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에는 반항의 기색이 전혀 없었지만, 앞선 싸움으로 인해 남아진 열기는 어쩔 수 없었다.

- 웬 구경질들이냐!

기숙사장의 큰 외침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이 작게 웅성거림과 함께 흩어졌다. 파우스트에게 두들겨 맞은 학생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등을 돌리곤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방문이 닫혔다. 파우스트는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 뒤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벽난로 구석에서 느껴졌던 시선만이 뇌의 한 구석에서 요동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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