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 종교 소재 주의
엔하이픈(ENHYPEN) - No Doubt
재생하시고 읽어주시면 몰입에 도움이 됩니다!
6
악마는 흰 꽃들을 엮어 화관을 만들었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신기해라. 응. 악마치곤 너무 천사 같았나? 일단 이거 써봐. 익숙한 꽃향기가 훅 들어오며 머리 위로 안착했다. 악마는 환히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긴 거울도 없고, 물엔 사람의 형체가 비치지 않아서 내 모습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악마가 아름답다 한 그 한마디면 충분하였다.
"궁금한 게 있어요. 이 꽃의 이름은 뭔가요? 곳곳에 많이 있었는데, 향과 모양만 알지 이름을 몰라서.."
"서향. 어떤 사람들은 천리향이라고 부르기도 하더라. 꽃이 피면 그 향기가 천 리를 간대. 그만큼 향이 좋지?"
"네. 계속 맡고 싶어서 여러 곳에 꽃병을 두었어요."
"그런 거구나. 너 닮아서 예뻐."
악마는 조심히 나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붉어진 제 볼을 보며 김빠지게 웃고는 이번엔 볼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지지 않겠다고 나도 입을 악마의 볼에 맞추자 소리 내 웃었다. 둘이서 서로를 안고 한바탕 웃으니 사이좋은 연인 같았다. 악마는 어느새 삐뚤어진 화관을 바로 잡아주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 몸에 밴 천리향의 향을 맡는 것일까? 나도 그를 안자 악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너 지금 나랑 있을 때 중 제일 크고, 많이 웃었어. 앞으로도 그렇게 웃고 살아야 해. 알겠지?"
"당신이 제 곁에 있어준다면요."
악마는 대답 없이 내 입에 자신의 입을 포개었다. 그다음은 몽롱한 천리향의 향기에 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중에 흐릿하게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서향, 그러니까 천리향의 꽃말은, 불멸, 그리고 꿈속의 사랑... 사랑은 불멸한가?
7
꿈이 없는 꿈을 꾸었다. 처음이었나. 나를 안고 잠들어 있는 악마의 날개가 삐걱대었다. 그 날개를 어루어 만지고 있자 잠에서 깬 악마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깼어? ... 오랜만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미안, 물부터 마셔. 악마가 건넨 유리잔의 물을 마시자 버석한 입술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으.. 이제야 괜찮네요.. 미안. 너가 너무 예쁜 걸 어떡해. 그럼 그만 좀 괴롭히지. 하하..
"근데 너 꿈은? 뭐 이상한 거 꾼 거 아니야?"
"아니요, 꿈을 안 꿨어요."
"휴, 다행이네. 이제 꿈꾸게 안 할게. 편히 있어."
악마는 내 눈가에 입을 맞추곤 나를 다시 눕혔다. 큰 창틀에선 밝은 햇빛이 우릴 비추고 있었다. 옆엔 향을 풍기는 천리향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내 일상이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우리의 사랑은 불멸할 거라 믿는다. 비록 언젠가 이곳이 흐트러지더라도, 사랑만큼은...
8
"이 교회의 밖이 궁금하지 않아?"
악마는 높게 햇빛이 비치는 창을 보며 말했다. 딱히요. 나가고 싶진 않고? 악마님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지금이 좋아요. 바깥세상의 거친 물살이 아닌, 교회 안에서의 잔잔한 물이 좋았다. 우리 말곤 아무도 숨 쉬지 않는 고요한 이 공간. 난 불멸의 사랑을 원했다.
"난 진지하게 물은 건데."
"저도 진지해요."
"그렇지만 너도 언젠간 이 창 너머를 원하게 될 거야."
"아니요. 저 너머엔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 확실시되나요? 전 오히려 두려워할 거에요. 우리 둘이 아니라는 건 정말 끔찍하니까."
"하하, 이거 큰일인걸?"
악마는 웃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런 악마를 끌어안았다. 영원할 걸 알면서도 두려워서. 악마와 천사의 끝은 비극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았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그 운명의 돌연변이이기를 빌었다. 이 사랑엔 끝이 없기를 빌었다.
9
무릎까지 오는 물의 세기에 힘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넘어지기도 했고, 악마는 그런 나를 걱정하였지만, 표정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보았다. 햇빛은 가끔 깜빡거렸고, 교회 곳곳엔 금이 갔다. 결정적으론 물에 우리의 형상이 비쳤다. 이곳이 붕괴하고 있다.
우리의 사이도 한츰 멀어지고 있었다. 악마는 자주 자리를 비웠고, 결국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스타킹이 불편하게 느껴졌고 허기짐이 돌았다. 이 세계가 변해가고 있다. 불안에 떨며 올라간 흰 탁자에선 제 날개의 깃털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울음을 겨우 참으며 고독의 시간을 버텼다. 예전엔 혼자가 익숙했는데, 지금은 악마가 필요했다. 절실히.
10
돌아온 악마의 모습은 어딘가 초췌했다. 곳곳엔 멍이 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는 내 머리를 쓸며 연신 사과를 했다. 미안, 일이 너무 바빴어. 무서웠겠다. 내가 미안... 어느새 그의 날개는 더욱 삐걱거렸다.
악마는 울음을 그친 나를 데리고 천천히 교회를 돌아다녔다. 우린 말 없이 서로의 온기만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다 눈에 띈 건, 높고 불투명한 유리문. 수백 번 거니던 교회였지만 이곳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는 눈에 띄게 덤덤한 표정으로 날 이끌었다. 유난히 물이 거세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내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 보며 말을 꺼냈다. 유난히 떨려오는 눈동자 속엔 힘든 결심이 자리 잡아 있었다.
"나는 악마야. 악마는 악한 존재지. 누구에게나 악해야만 해.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더라도."
그렇게 말하는 악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굳센 그의 눈에 나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나를 미워해도 좋아. 넌 저 문을 열어야 해."
악마는 내 두 손에 입을 진하게 맞추고선 날 밀었다. 아까보다 거세진 물살에 크게 휘청이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잡아주진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어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싫어요. 정녕 이곳이 무너지더라도, 악마님과 함께하겠어요. 그러니 제발, 제 손을 잡아주세요. 전 다시 넘어질지도 몰라요."
"아니, 넌 악마를 미워하고 증오해야 해. 난 더는 널 붙잡을 수 없어."
"대체 왜죠? 당신은 절 사랑하지 않나요? 우리의 사랑은 불멸한다고 믿었어요. 근데 당신이, 어떻게 저한테.."
"사랑해,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이런다고!"
다시 눈물로 뒤덮힌 나의 얼굴을 애써 무시하고 악마는 나를 문쪽으로 밀었다. 잠시 뒤면 우리를 덮칠 큰물들에 난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물이 나를 삼키며 정신을 잃어갔다. 물속엔 어느새 검은색이 되어버린 천리향이 떠다니고 있었다. 내 목에 걸려있던 검은 천은 물에 휩쓸려 풀려버렸다.
악마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꿈속에서만은 사랑이 불멸한다고.
1?
햇살이 눈앞을 간지럽혀 잠에서 깼다. 베개는 땀에 젖어 축축했다. 침대 옆 화분에는 천리향 몇 송이가 꽂혀있었다. 저 꽃, 어디서 많이 봤는데. 몽롱한 기운에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온통 흰색으로 이루어진 원룸엔 아무도 오지 않는다. 해가 들어왔던 높고 작은 창문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진동이 울려 들여다본 폰엔 억지로 꾸었던 꿈속에서 많이 들었던 이름들이 사과를 건네왔다. 감정 따윈 느껴지지 않고, 그냥 형식적인 사과. 어느새 오른쪽 어깨까지 내려온 옷을 바로 입곤 일어난 그때, 발 앞으로 꽃 한 송이가 떨어졌다. 검은 천리향.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악마, 악마님.. 검게 물든 천리향의 향은 그대로였다. 억지로 꽃을 으스러트리자 향이 집 전체로 퍼지는 것 같았다. 제발, 꿈 따위 다시 꾸고 싶은데... 불멸이라며, 우리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결국 꿈속의 사랑이었던 거야?
-
외전 있어요
https://curious.quizby.me/G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