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치면 지워지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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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07:46조회 55댓글 6신나경(RIZZ)
#3. 빗방울이 새겨지는 깊이



“……다 봤어?”

이상현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교실을 가득 채운 빗소리보다 더 선명하게 내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창밖에서 들이치는 서늘한 빗물 안개 때문인지, 아니면 이상현의 알 수 없는 눈빛 때문인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건 명백한 내 잘못이었으니까. 하지만 공책에 적혀 있던 그 기괴하고 슬픈 문장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 대신 엉뚱한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이상현, 너…… 이거 무슨 소리야?”

“……”

“누적 강수량이니, 몸이 흐려진다느니…… 그리고 너 이번 장마 끝나면 전학 간다는 거 진짜야? 아주 멀리 간다는 게, 설마 병원 같은 데야? 너 어디 많이 아파?”

내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상현이 불치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자기를 잊어버린다는 그런 슬픈 글을 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 질문을 들은 이상현은 화를 내지도,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쥔 공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평소의 무덤덤하고 슬픈 눈빛으로 돌아와 나를 보았다.

“한시은.”

“어, 어?”

“너 기상청 예보관이 꿈이랬지.”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럼 날씨에 대해 잘 알겠네. 비가 내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

이상현은 천천히 걸어와 교실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창문 유리에 부딪혀 사방으로 깨지는 빗방울을 응시하는 그 애의 옆모습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사람들은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장마가 끝나면 다시 맑은 하늘을 보며 일상으로 돌아가잖아. 그게 당연한 거니까.”

“그렇지…… 근데 그게 네 일기랑 무슨 상관인데?”

“장마가 끝나고 하늘이 개면, 사람들은 그동안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비 때문에 뭐가 젖었었는지 전부 잊어버려. 웅덩이에 고여 있던 물도 햇볕에 증발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상현이 천천히 돌아서서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애의 눈동자는 마치 거대한 물웅덩이처럼 깊고 고요했다.

“나도 똑같아.”

“……뭐?”

“이 장마가 끝나면, 난 이곳에서 완전히 사라져. 전학을 가는 게 아니야. 그냥 이 세상에서 증발하듯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지워지는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 마치 비가 그치면 물웅덩이가 사라지듯 아주 당연하게.”

이상현의 목소리는 너무나 덤덤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판타지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고 비웃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이상현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해서, 그리고 그 눈 밑에 짙게 깔린 외로움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감히 장난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사람이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리고 사람들이 널 왜 잊어?”

“안 믿길 거야. 말하면서도 나도 미친 소리 같으니까.”

이상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기 교복 셔츠의 왼쪽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이거 봐.”

그 애가 보여준 왼쪽 손목을 본 순간, 나는 숨을 흡 들이켰다. 이상현의 하얀 손목 피부 위에는 파란색 선이 마치 기압계의 그래프처럼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선의 윗부분이, 왠지 모르게 주변 피부와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투명하게 흐려져 있었다. 손가락을 대면 그대로 통과해 버릴 것만 같은 기묘한 이질감이었다.

“비가 내릴 때마다 이 선이 차올라. 그리고 내 몸은 조금씩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리지. 이번 장마에 예정된 총강수량이 다 채워지면…… 그때가 내 시한부야.”

교실 안에는 오직 거친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메웠다. 나는 충격으로 굳어버린 채 이상현과 그 애의 손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가슴은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이상현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애가 청소 시간에 '아주 멀리 간다'고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닫자, 가슴 찢어지는 슬픔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왜 하필 이상현일까. 왜 하필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게 된 소년이, 장마가 끝나면 사라지는 잔인한 운명을 타고난 걸까.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그렁그렁한 채 서 있자, 이상현은 걷어 올렸던 소매를 다시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리고는 내 앞으로 다가와 어제처럼 내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니까 한시은, 나한테 너무 가까이 오지 마.”

“이상현……”

“너까지 나중에 마음 아플 필요 없잖아. 어차피 잊혀질 사람인데.”

이상현은 가방을 메고 먼저 교실 문을 열고 나갔다. 빗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애의 남색 우산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교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니, 난 절대 안 잊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상이 다 그 애를 지워버린다고 해도, 장마가 끝나고 모든 물웅덩이가 마른다고 해도, 내 마음속에 내린 이상현이라는 장마는 절대로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다짐했다. 그 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이든 상관없었다. 장마가 끝나기 전까지, 이상현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가장 뜨거운 증거를 내가 만들어주겠다고.

그렇게 나는, 사라질 소년을 살리기 위한 나만의 무모하고도 슬픈 짝사랑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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