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랑하던 독립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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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4 17:27조회 37댓글 0필견
그와의 시간을 곱씹으며, 나는 마침내 그를 향한 나의 감정을 정의할 수 있었다. 이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를 너무나도 깊게 연모하게 될까 봐 자신에게 보내던 경고였다. 나의 마음을 깨 닫자, 그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 내려갔다. 하루, 이틀, 사흘... 매일같이 쓰다 다시 쓰기를 반복 하였다. 글씨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여. 마음을 온전히 담지 못하여서. 매번 다른 이유를 대며 겨우 완성한 연서는 아무리 보내봐도 답신이 오지 않았다.

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1902년 11월의 어느 날에는 첫눈이 내렸다. 하얗게 변한 세상에 들뜬 마음으로 몰래 빠져나 와 근처를 배회하고 있던 나의 귀에 아주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은 어두운 골목 안에서 부터,

“거기 누구요?”
“하하.. 오랜만이오.”

그였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체 없이 골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눈에 들어온 그는 앳된 모습이 사라진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닥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마주서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어 오랫동안 들여다보았으나 가득 담긴 꿈이, 야망이 엿보였다. 언제부터. 대체 무엇이. 내가 알던 그가 사라진 듯하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순간 비릿한 혈향이 바람을 타고 느껴졌다. 다쳤구나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니 손끝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서 아무 말도 안 하는 나를 보고 그는 아무도 밟지 않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눈의 깨끗한 부분만 모아 두 손 가득 들려 보여 주려 했으나 손에 남아있던 피에 더럽혀지는 눈을 보고는 미안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 이런... 낭자에게는 실수만 하는군.”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뺨에서 느껴지는 눈물의 흔적에 정신을 차렸다. 그였다. 내가 알던 다정한 사내였다. 염치없게도 그토록 그리워 하던 나의 정혼자였다.

“하, 흐으...”

피범벅이 되어 녹아내리는 눈을 털어내려는 그의 손을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부여잡고 고개를 폭 숙였다. 울음이 밀려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으나 소용없는 행위였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목구녕을 타고 그대로 흘러나왔다.

“아, 흐읍... 왜...”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이미 그의 피가 되어버린 눈을 애써 양손에 부여잡았다.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그의 마음은 새하얀 치맛자락을 더럽히며 나에게서 멀어져갔다.

알 수 있었다. 그가 왜 이런 곳에 다친 채로 숨어있었는지. 무엇이 그를 살아 숨 쉬게 하는지. 그가 무엇 때문에 눈을 빛내는지.

“하... 하지 마세요.”
“...”
“제발, 혼인합시다. 혼인해요... 도령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미안하오.”

최악이구나, 서월아. 나는 끝까지도 그를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오도록 만들었다. 나만을 위하고 나만을 생각하며 나만을 존중해 주는 자신의 모습에 얼굴 끝까지 벌정
겋게 달아올랐으나 꾹 참고선 오히려 당당하게 눈물범벅인 얼굴을 처들었다.

“감정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걸로는 안되겠습니까?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미 연모하면서도 연모하게 될까 거부하던 두려움이었습니다."
“나는...”
“도령 하나 보탠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운명은 이미 왜놈들의 손에 달려있어요. 바뀔 수 없습니다. 근데 어찌 이리 무모한 짓을 하십니까.”
“무모하지 않소.”
“조국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런들 도령의 목숨만 버리게 될 것입니다. 한낱 정의감에 치우처 이리 행동하지 마세요. 도령이 양반이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적어도 무탈하게 오랫동안 살 수 있습니다.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가시려 합니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이 나라를 버려야 무탈 하게 살수 있겠지. 낭자, 나는 왜놈들 편에 서서 이 조국을 버리는 데 일조할 수는 없소. 내가 나고 자란 이 땅을. 나의 부모님과 후손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하여 기꺼이 싸울 것이오. 더욱이 내가 양반이니 더 큰 힘을 보태줄 수 있겠지.”
“설령 독립이 된다고 하더라도 죽으면 도령에 게는 무엇이 남습니까?”
“글쎄. 한 번 사는 인생 적어도 후회하며 부끄러운 삶을 살다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독립되어 후손들이 우리의 노력을 기억해 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오.”

그의 대답에 체념하여 치마를 들어 올리고선 속치마 끝 다락을 거칠게 잡아 뜯었으나 힘 한 번 써본 적 없는 여인의 팔로 무엇을 뜯을 수 있 을까.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그가 뒤돌아서려다 뜯지 못하는 나를 보고는 머뭇거리다 대신 손을 대 뜯어주었다. 조용한 침묵 속에 그의 겉옷을 벗기고선 총상을 입은 어깨에 둘둘 말아주었다. 그대로 뒤돌아 돌아가려다 미련이 남아 다시 한번 말을 걸어본다.

“그거 아십니까? 눈이 빛나십니다, 이제.”
“그럴 수밖에.”
“이제라도 마음이 가시는 것을 찾아 다행입니다.”
“조국을 빼앗길 위기에 놓였는데 눈을 빛낼 수는 없었소. 이제 지키는 방법을 찾은 것뿐이지.”
“그 방법이 너무나도 위험합니다.”
“낭자의 말처럼 이제야 사는 것 같소.”
“똑똑히 후회하실 것입니다.”

글쎄, 그대는 후회했을까. 나는 하였다. 그이를 그리 보내고부터 한시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어느 날은 그리 모질게 말하지 말걸 하며 후회하면서도 어느 날은 더 모질게 말하여 붙잡아 둘 걸 하며 후회하였다. 허나, 그렇게 했더라도 과연 그대는 나의 손에 붙잡혀 주었을까.

그 길로 일본인과 혼인을 하였다. 나는 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대항할 용기도 조국을 향한 애국심도 없었으니, 울타리가 되어줄 일본인과 의혼인은 나에게 있어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의 남편은 그리 좋은 이는 아니었다. 수많은 여인을 첩으로 삼으며 나를 천대하였지만 나도 그리 좋은 아내는 아니었으니 딱히 불만은 없었다.

꽃이 지고 낙엽이 물들어 눈이오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놋그릇을 찾아 한가득 눈을 담아 돌아왔다. 마치 방문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아 뼈가 아리는 겨울바람에도 활짝 열어둔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추운 공기에도 눈은 금세 녹았으며 녹은 눈은 전혀 깨끗하지 아니하였다. 아니, 오히려 더러웠다. 그 물을 들여다보다 헛구역질이 올라왔음에도 나는 다음 날이 될 때까지 차마 버리지 못 하고 들여다보곤 했다. 마치 나를 닮아서. 온갖 깨끗하고 고결한 척 해대던 추악한 나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죽고 싶었으나 나는 우습게도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 하긴, 있었다면 이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겠지. 아아, 이런 나는 그대에게 얼마나 비겁해 보였을까.

깨끗해서 좋아하였던 눈은 깨끗하지 않았으며 빛나지 않아 싫어하였던 사내는 누구보다도 빛나던 이였다. 영원히 묻어둘 걸. 그럼 영영 몰랐을 텐데. 눈을 좋아하던 순진한 나의 마음도. 그를 연모하는지 몰랐던 나의 마음도.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자라고 여기던 나의 마음까지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인데. 나는 이걸 어째 깨달아서 이리 고통 속에 허덕이는가.

“아, 나는 여전히 지독하게도 나만을 생각하는구나.”

1938년 2월의 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나의 목숨이 여기까지인 것을. 허나 아직도 조선은 독립을 맞이하지 못하였다. 내가 눈을 감는 이날까지도. 이리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살았는가.

살았다면 부디 목숨 바쳐 지켜낸 조선의 독립을 눈에 담고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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