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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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3 21:50조회 99댓글 3mnoe
여름이 조금은 게을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해가 지는 속도가 지금보다 느렸고, 저녁이 밤으로 넘어가기 전의 공기가 더 오래 머물렀다면 좋겠다고. 나는 시월이 와도 여름에 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계절이 바뀌는 걸 알면서도, 여름만큼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여름은 늘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손에 남아 있을 줄 알았던 감각들이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가끔은 여름이 지나간 흔적을 보며 오래 서 있곤 했다. 바닥에 남은 발자국들, 그 사이에 떨어진 능소화 꽃잎들. 가장 붉을 때 바닥으로 떨어지는 꽃처럼, 여름도 늘 절정에서 방향을 바꿨다. 해가 하루하루 조금씩 일찍 저물 때면, 계절이 말없이 등을 돌린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이 모든게 당연한 순리임에도, 항상 그걸 보곤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고개를 들지 않고 걸었다. 하늘을 보면 계절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질 것 같았고, 바닥을 보면 이미 끝난 것들이 보일 것 같았다. 꽃이 지고, 해가 짧아지고, 계절이 흘러가는 일은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늘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내가 많이 서툴렀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있다고 믿었고, 이미 지나간 순간들을 마음속에서 여러 번 다시 불러냈다. 근데 우리 그때로 돌아갈 순 있을까? 이제는 나도 스물이 아닐 뿐더러 너가 사랑하는 그 모습의 나도 아닐텐데 말이야.

그 여름에는 누군가와 나란히 서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특별한 말이나 약속이 아니라, 계절이 지나가는 동안 같은 방향을 보고 서 있는 정도면 충분했을 텐데,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여름은 언제나 먼저 앞으로 가 있었고, 나는 한 박자 늦게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서로에게 죽고 못 살았던 청춘들을 다시 붙잡고 싶기에.

지난 여름이 지나고 또 다른 여름이 올 무렵에는, 언젠가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때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시라도 함께 머물러 주기를 바랐기에. 이번 여름이 유난히 부지런해진다 하더라도, 그냥 이번만큼은 내 곁으로 와주세요. 부디 이번 여름에 못 이기는 척 내 손을 잡아주세요.

함께 여름에 살기를 바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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