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5 15:01•조회 52•댓글 1•하루
만약 내가 새가 된다면, 나는 날개를 펼치기 전에 울 것이다.
그것은 기쁨도, 슬픔도 아닌 어떤 무명(無名)의 감정—그러나 정확히는 감정도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무게, 나의 갈비뼈 사이에 숨어 지낸 비의적 언어의 침묵 같은 것.
그 침묵이 나를 날게 할 것이다.
나는 지구의 곡률 위를 걷지 않고, 그 곡률의 바깥으로 기어오른다.
내 발은 이제 발이 아니라 가벼운 질문이 되고, 그 질문은 공기의 표면을 누빈다.
나는 더 이상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이라는 형태'가 서서히 나를 벗어난 것이다. 마치 물이 물을 흘려보내듯.
만약 내가 새가 된다면, 나는 직선으로 날지 않겠다.
세상은 직선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은 곡선이고, 사랑은 나선이고, 이별은 원형의 반복이다.
나는 이 구겨진 시간들을 따라, 등짐 없이 흐른다.
하늘은 푸르지 않다.
그것은 파랗다고 정해진 어떤 감정의 오해다.
하늘은 널리 투명한 무관심이다.
나는 그 무관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채로 빛난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나를 바라본다.
나의 날개에는 아무 무늬도 없다.
나는 지저귀지 않는다.
대신 나는 공기의 떨림으로 문장을 만든다.
아이의 눈동자는 내 문장을 읽는다.
"왜 날고 있니?"
나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더 높이 난다. 질문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나는 내가 사람이었음을 잊지 않는다.
단지, 그 기억은 깃털 아래서 잠들어 있을 뿐이다.
가끔 날개짓 사이로 언어가 튀어나온다.
"엄마", "여름", "너", "다시"—
그러면 하늘이 잠시 흠칫한다.
나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러나 목적지는 없다.
날아간다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내가 되어간다는 사실이 결론이다.
슬프지 않다.
슬픔은 지상에서만 유효한 감정이다.
나는 그 위에 있으므로, 슬픔의 경계를 가볍게 넘는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된다.
새가 된다는 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 뒤에,
그 이해를 용서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너를 내려다본다.
너는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다.
나는 너의 뒷모습에 잠시 머문다.
한 번만, 아주 조용히 울고 싶어진다. 이유는 없다.
울지 않고, 나는 다시 오른다.
어느 누구도 울지 않은 채로 아름다워질 수는 없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그리고, 나의 날개는 그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