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0 10:59•조회 33•댓글 0•010
도서관 뒤편, 오래된 벤치에는 늘 바람이 불었다.
소년 은호는 자주 그곳에 앉아 있었다. 도서관 안에서는 친구들 속에 어울리지 못했고, 집으로 돌아가면 언제나 혼자였으니, 벤치만이 유일하게 편안한 자리였다.
어느 날, 바람이 유난히 거세게 불던 오후였다. 책장이 휘날리고 연필이 구르는 순간, 낯선 종이 한 장이 발치로 굴러왔다. 누군가 일부러 두고 간 듯,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오래된 편지지였다.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글씨는 삐뚤빼뚤했지만 묘하게 진심이 느껴졌다.
“언젠가 누군가 이 편지를 본다면, 나는 이미 이곳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제발 기억해 주세요. 여기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걸.”
은호는 한참 동안 그 글을 바라보았다. ‘이미 없을 거예요’라니.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직 살아 있을까, 아니면 정말 사라져버린 걸까.
그날 이후 은호는 괜히 도서관 뒷벤치를 찾았다. 혹시 또 다른 편지가 바람에 실려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은 없었지만, 정확히 일주일째 되던 새벽,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 둔 채 잠든 은호의 방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흘러들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분명 어젯밤까진 없었던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찾아줘서 고마워요.”
은호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우연일까, 장난일까. 그러나 필체는 분명 처음 본 그 편지와 같았다.
그 후로 은호는 매일 창문을 열어 두고 잠들었다. 편지는 규칙 없이 찾아왔다. 어떤 날은 아무 소식이 없었고, 어떤 날은 두 장이 겹쳐 도착하기도 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어요.”
“사람들은 나를 보지 못해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찾았어요.”
“혹시… 나랑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은호는 편지를 차곡차곡 모아 공책에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답장을 쓰기로 했다.
“나는 은호라고 해. 넌 누구야? 어디서 온 거야?”
답장은 바로 다음 날 새벽 도착했다.
“내 이름은 지연이에요. 나는 오래전, 이 도서관 근처에 살았어요.”
그 뒤로 은호와 지연의 대화는 깊어졌다. 지연은 책을 좋아했고, 바람 부는 날이면 도서관 뒷벤치에 앉아 글을 쓰곤 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때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갔다고 했다.
은호는 지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묘한 위로를 느꼈다. 살아 있는 사람들 곁에서도 외로움만 느껴왔는데,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의 대화는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연의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은호야, 사실 나는 곧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오래전부터 이곳에 얽매여 있었는데, 너를 만나고 나서 조금씩 자유로워졌어. 고마워.”
그날 밤, 은호는 편지를 붙잡고 울었다.
“가지 마. 나는 아직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눈물로 얼룩진 답장을 창가에 걸어 두었다.
마지막 새벽, 바람은 유난히 거세게 불었다. 창문은 덜컥거렸고, 종이들은 방 안에서 흩날리며 춤을 췄다. 책상 위에 놓인 마지막 편지에는 단 몇 줄만이 남겨져 있었다.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그리고 너도 혼자가 아니라는 걸.”
그 뒤로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은호는 여전히 도서관 뒤 벤치를 찾는다. 손에는 늘 작은 공책을 들고서. 그 공책에는 지연의 편지들이 붙어 있고, 이제는 은호가 직접 써 내려간 글도 섞여 있다.
바람이 불 때면 은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지연아, 너의 이야기는 내가 계속 써 내려갈게. 넌 사라지지 않았어.”
바람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 은호는 알 수 있다. 벤치 옆에 누군가 앉아 있는 듯, 따뜻한 기운이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