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허무한 낙관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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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6 18:05조회 88댓글 65eo1z
□ SOU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면


살결이 젖혀져 분홍에서 붉음,


다시 어둠으로 물든 것처럼 보인다.


작은 입속의 하늘에 노을 구름이 번진다.


그 구름을 아주 잘 다뤄야 해.


언젠가 할머니가 말했다.


해를 삼킨 구름은 흩어지며 그 해를 다시 밸는단다.


손가락 양옆의 푸른 핏줄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붉은 끝을 이룬다.


끝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달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울렸을까?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억을 그 자리에서 흘려보냈을까.


손가락 끝마다 조그마한 뇌가 달려 있다면


달래고, 울리고, 붙잡았던 순간들이


손톱 밑에 둥글게 말려 있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왠지


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구름낀 하늘을 올려다볼때마다


바다의 기억을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그저 파랑기만 한


맑은 하늘이 재미없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나를 쳐다봤을 때


그 위로는 파란 하늘이었으면 좋겠다.


그 누군가가


나 말고는 지루해서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도록.


그리고 내가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느끼도록.


실은,


사람의 시선을 좋아하는 나를


누군가가 말려줬으면 좋겠다.


집에 오면서 폐기되기를 기다리는


하얀 냉장고를 봤다.


투명하고 두꺼운 테이프로 묶인,


두 개의 문.


그 냉장고에는 몇 단지의 몇동이 버렸는지 검은 네임펜으로 써져 있었는지.


어둑한 길거리에서


홀로 하얀빛을 잃지 않은 채


버티며 서있는 그 냉장고가 어린 아이처럼 순진해보였다.


내가 그 냉장고였다면,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써져있었을까?


나라면 몰래


냉동실 깊숙히,


작은 송곳을 숨겼을지도 몰라.


작아서 더 뾰족한,


그런 송곳을 숨겼을지도 몰라.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그 송곳의 존재를 생각하며


혼자 불안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존재이긴 한 걸까?


아니면 그저 오래 버티는 냉장고인 걸까?


창밖의 붉은 태양이 홍빛을 토하며

또,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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