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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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9 21:45조회 100댓글 6소야
약수위









*

- 그니까 ‘체리’라는 애를 죽여달라는 거네요. 위조 신분은 확실하게 보장된거 맞죠?

- 날 뭘로 보는거야? 당연하지.


찌푸린 얼굴로 봉투 속 착수금을 셌다. 정확히 오만 홍콩달러. 중국 돈이나 미국 돈이 아닌 게 내심 아쉬웠지만 이게 어디야. 의뢰금을 전부 받으면 환전하고 날라도 몇 년은 거뜬했다. 높으신 분의 대리자라는 그 사람은 돈 계산이 끝나자마자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졌다.


에단은 돈과 함께 봉투에 담겨 있던 종이를 펼쳤다. 대상의 신상 정보와 사진들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사창가 ‘칭세퐁’ 클럽의 접객 중 하나. 클럽에서 쓰는 가명은 체리……. 희한한 이름을 쓰네. 에단은 반질반질한 종이를 만지다가 되도 않는 감상에 빠지기 전에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예쁘긴 확실히 예뻤다. 미인이 흘러넘친다는 사창가에서도 이만한 외모는 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얼굴 하나 믿고 아무나 잡아서 뜯어먹은 것 같은데, 하필이면 건드린 사람이 이만한 거물이라니 쟤도 참 안타까운 운명이다. 구룡채성이 아니었다면 연예인이나 배우로 자라게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에 같은 건 쓸모없는 말이긴 하지만.


한낮. 에단은 본격적으로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년엔가, 구룡채성의 철거 계획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던 일이 있다. 당연히 난리가 났지. 배상금은 선수금이랑 완전히 똑같았다. 고작 오만 홍콩달러가 끝이었다. 그거 가지고는 밖에서 방 하나 구할 수 없다. 그걸 깨달은 구룡채성 사람들은 마지막 한탕을 노리기 시작했다. 에단이나, 체리처럼. 목숨을 걸고.


일부러 술을 좀 마셨다. 취한 사람처럼 보여야 사창가에 진입하기 쉽다. 젊은 남자 한 명이 혼자 사창가를 두리번거리는 것만큼 수상한 일이 없으니까. 에단은 사창가 근처의 여러 술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칭세퐁’ 클럽을 물었다.


- 혹시 칭세퐁에 대해 좀 아는 거 있어?

- 칭세퐁이라…… 거기 요물이 하나 있지.

- 요물이라니?

- 자네도 소문 듣고 온 거 아닌가? 그 소문의 ‘체리’를 만나러 구룡채성 밖에서까지 손님이 찾아온다고 하네.

- 뭐?


체리가 생각보다도 더 거물인 모양이다. 브로커가 돈을 세게 부를 때 진작 의심했어야 하는데. 그새 대화가 새어나간건지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이쪽 테이블로 오곤 본인이 체리를 본 적이 있다며 일명 체리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체리의 외모를 자그마치 십 분 동안이나 장황하게 묘사했다. 길었던 외모 묘사가 끝나갈 때 즈음에 에단의 근처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몰린 뒤였다. 에단은 테이블이 같이 떨릴 정도로 심하게 다리를 떨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봐야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애 한 명이야. 마음 먹은 지금 죽이러 간다. 연줄이 있으면 보복당하기 전에 중국으로 뜨면 그만이야. 이 지긋지긋한 구룡채성에서 떠나는 거다. 드디어.


해가 정확히 중앙에 뜬 정오 십 분 동안이 아니면 항상 어둠 속에 갖혀 살아야 했다. 닭장처럼 길고 높게 이어진 아파트의 행렬에는 마르다 만 빨래와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두 명이 듣다가 두 명이 다 죽을 것 같은 축 늘어진 노래들과 낮에도 밝은 네온 사인이 죽어가는 구룡채성을 화려하게 비췄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칭세퐁’이 있었다.


- 체리를 내놔!


에단은 맑은 눈을 한 채 순식간에 벽 쪽에 붙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맞은편 벽에 붙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에단이 원래 붙어 있던 벽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에단은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주정을 부리고 있었다. 에단이 또 맞은편 벽에 붙었다. 알콜 한 방울만 마셔도 죽어라 빨개지는 몸뚱아리를 고마워할 데가 다 있네. 체리를 달라는 주정뱅이의 진상 짓에 칭세퐁 직원들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에단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에단이 그 눈짓을 못 알아챌리가 없다. 돈이 좀 아깝긴 하지만…….


에단이 지갑을 열어 백 홍콩달러짜리 지폐 몇십 장을 아무렇게나 뿌렸다.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직원들의 눈빛이 순간 달라지더니 누가 먼저랄 새 없이 사람 좋은 얼굴로 에단에게 접근했다.


- 체리를 원하신다고요?

- 그래!

- 이리로 오시죠.


태도가 단번에 바뀌는 걸 보니 돈이 좋긴 좋다. 직원은 엘레베이터에 올라타더니 칭세퐁의 화려한 상층 대신 지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룡채성에서 지하층은 보통 한 가지 뜻을 내포한다. 치외법권 안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범법 행위가 이뤄지는 범죄의 장. 에단은 지하층으로 내려가서 발끝까지 털리고 살해당하는 상상을 하며 주머니에 숨겨 둔 권총을 매만졌다. 엘레베이터가 지하 삼 층을 가리키고 에단은 잠시 고민하다 직원에게 지폐 몇 장을 건네 주었다. 긴 복도와 여러 개의 문이 보였다. 직원은 줄곧 걸어가다 복도 끝에 도착해서야 멈춰섰다.


- 여깁니다.


직원이 공손하게 말하곤 낡아 빠진 문을 세게 두드렸다. 쾅 쾅 하는 소리가 지하층 전체에 울렸다. 체리 양! 손님 받아! 에단에게 웃던 얼굴이 전부 가식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직원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직원은 금방 다시 미소 짓곤 에단에게 목례한 뒤 엘레베이터에 올라 탔다. 여닫이 문은 요란하게도 열렸다. 훅 끼친 희뿌연 연기에서 담배 향과 대마 향이 동시에 났다. 에단은 손부채질로 연기를 날려보냈다. 커다란 소파 가운데에 여왕처럼 다리 꼬고 앉아있는 사람은 에단이 본 인생 최대의 미녀였다. 족히 오 센치는 넘을 듯한 체리 색 네일이 정확히 에단을 가리켰다.


- 아안녀엉.


체리가 느긋하게 인사했다.


- 일로 와 봐아.


말꼬리를 늘리는 버릇이 있나. 말하다 말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구슬 같은 목소리와 잇새로 새어나오는 향기로운 숨결. 동시에 뭉개지는 활자들. 에단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약도 간접 흡연이 되는 건 아닐 텐데 뱉는 숨이 뜨거웠다. 약에 취해 정신도 못 가누는 가냘픈 여자 한 명에게 걸어가는 것 뿐인데 포식자의 영역에 들어가는 피식자마냥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에단의 심장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 ……체리.

- 어디서 또 내 이름을 듣고 왔나 보네에.

- 체리.


그 이름을 곱씹었다. 체리는 가만히 앉아서 몸을 앞으로 빼더니 서 있는 에단을 올려다봤다. 나른하게 웃고 있는 체리의 눈이 활처럼 휘어 있었다. 우수에 잠긴 그 눈동자는 몇백 광년 떨어진 곳의 성운을 담은 것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우주 초기 빅뱅을 타고 넘어온 태초의 아름다움이 무언의 본능을 건드렸다. 떡칠한 화장과 덧붙인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체리의 진짜 살갗이 마치…… 젠장.


에단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총을 장전했다. 콰득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서둘러 체리의 입 안에 권총 머리를 들이밀었다. 머리통이나 이마가 아닌 입 안에 쑤셔 넣은 이유는 비명을 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 소리치면 쏜다.


체리는 이 상황을 수백 번이고 겪어본 적 있는 사람처럼 요동조차 없었다. 체리의 눈동자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거야.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그때 아랫배 부근에서 뭔가 간질거리는 게 느껴졌다. 체리가 긴 손톱을 세운 채 옷 위로 에단의 배를 긁고 있었다. 그 손은 점점 아래를 향하더니 이내 상의를 살짝 걷어낸 체리의 손가락과 에단의 복근이 맞닿았다. 에단은 너무 간지러워서 몸을 움츠리고 싶었다.


- 진짜 쏜다! 멈추라고!


에단이 소리치며 총을 더 깊게 밀어넣었다. 어디에 잘못 닿은 건지 켁켁대던 체리가 일순간 고개를 치켜들더니 혀를 길게 빼서 총을 정성스레 핥기 시작했다.


아, 씨발, 신이시여. 두 손으로 쥔 총이 덜덜 떨렸다. 그렇다고 총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체리 저 미친년은 기어이 실탄이 들어있는 총을 우물대려고 하고 있었다. 체리의 침이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손에 힘이 점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총은 침을 길게 늘이며 달그락 하고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자길 죽이려는 놈이 앞에 있는데도 그냥 실실 웃고 마는 체리를 바라보며 에단은 진심으로 선수금 갖고 그냥 튀어버릴까 고민했다. 욕망. 사랑. 혼란. 뭐 그런 여러 가지 추상들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생각도 못 했고. 헤벌레 누나 좋아요 인격이랑 중국 가서 새 인생 살아갈 어른 남자 인격 중에서 뭘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에단은 그냥 제일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했다.


- ……키스해줘.


닿은 입술이 미치게 달콤했다.




















*

- 너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


키스를 몇 분이나 처 해댄 건지 입술이 부르트다 못해 피가 나올 때쯤에 체리는 정신을 차렸다. 에단은 솔직히 정신 차린 체리가 자길 죽이거나 도망쳐서 직원들에게 일러바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냥 눈이 조금 더 맑고 말꼬리 늘리는 버릇이 사라진 것 말곤 큰 차이가 없었다. 그니까 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체리랑 한바탕 진한 키스를…… 했다 이거지. 에단은 마녀한테 홀린 기분이 들어서 왠지 억울해졌다. 그럼에도 체리와의 키스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최고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언빌리버블. 베스트. 뭐. 그런 몇개 없는 아는 영어 단어를 끌어올 만큼 최고였다.


- 나 죽이면 얼마 준댔는데?

- 삼십만 홍콩 달러……

- 너 부자냐?

- 나도 모르겠다, 씨발. 그냥 죽일 걸.

- 죽여 보던가.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맛보게 해 놓곤 도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기어들어가게 하다니. 착수금 받아놓고 배 째는 건 길거리 삼류 잡배들이나 하는 짓이었는데 분명. 에단은 체리와 키스밖에 더 안 했으면서 책임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인생 앞으로 어떡하냐.


- 선수금 오만 달러 받았는데 나랑 중국으로 튈래?

- 누구 좋으라고.


체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에단도 사실 알고 있었다. 체리에게 에단은 그저 키스 한 번에 뿅 간 호구 같은 엑스트라 도적일 뿐이었다. 체리의 암살. 지금 당장 총을 잡아서 그 예쁜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살길은 그거밖에 없는 걸 아는데도 에단은 체리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그새 사랑하게 되어 버린지도 몰랐다.


우습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다시 지하로 내려왔다. 예약 시간이 다 됐다고 그만 나가줘야 한단다. 밖을 나가니 벌써 밤이 된 건지 그게 아니면 그냥 태양이 건물에 가려졌을 뿐인 건지 아주 어두웠다. 직원이 말하길 보통 한 번 예약할 때 세 시간이 잡힌다고 했다. 에단은 고작 세 시간 사이에 인생이 망해버린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체리가 자주 찾아오라고, 돈 안 들고와도 받아준다고 말했었는데 그게 진심인지 입 발린 말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에단은 몇 번 더 칭세퐁을 찾았다. 갈 때마다 대책 없이 세 시간 내내 키스만 해댔는데 그거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앞니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에단은 자주 가는 구석진 야매 치과를 찾았다. 구룡채성에는 재대로 된 병원이 단 한 개도 없다. 그래서 에단은 아플 때마다 이 치과를 찾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머리가 아파도 왔고 배가 아파도 왔고 이가 아파도 왔다. 자격증도 없는 의사는 에단을 보곤 반가워하며 곰팡이 핀 침대 위에 누우라고 시켰다.


그리고 에단은 그 모든 걸 털어놨다. 체리라는 사창가 최고의 미친년을 만났는데 키스할 때 승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형. 그 말에 거대한 거울로 에단의 이빨을 샅샅이 살피던 의사가 순간 멈칫하더니.


- 예쁜 체리라면 나도 한 명 알고 있는데.

- 체리? 본명이?

- 어. 본명이 체리고. 삼 년 전 막 스물 되자마자 여기서 일해보겠다고 그러길래 한 달 정도 같이 일했지 아마. 평생 본 사람 중에 제일 예뻤어.


에단은 직감적으로 둘이 ‘같은 체리’를 말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본명이 체리였다니. 어떤 미친 여자가 가명으로 지 본명을 써. 이름이 체리가 아닌 체리는 상상조차 안 됐었는데 정말 이름이 체리였다니. 실소하며 의사의 말을 되새김질하던 에단은 문득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 잠시만. 삼 년 전에 스물이라고? 그러면 지금은 스물 셋?

- 그런 셈이네.

- 그럼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리잖아.


에단이 치료받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살이나 어린 주제에 반말이나 찍찍 해 댔던 거야? 키스할 때도 항상 주도하고 명령이나 하길래 당연히 누나인 줄 알았는데. 에단은 체리를 떠올렸다. 낙타 삶아 먹는 보아뱀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오백 살 먹은 구미호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겨우. 에단은 갑자기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돈도 안 내고 밖으로 막 걸어가기 시작했다.




















*

충동적으로 체리에게 갔지만 평소와 다를 것도 없었다. 에단은 잔뜩 키스하다가 기진맥진하여 바닥에 드러누웠다.


체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담배를 한 모금 빨곤 고개를 살짝 들어 숨을 뱉었다. 담배 필터에 고혹적인 립스틱이 묻어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처 발랐길래 저렇게 빨간 거야. 에단이 치과의사에게 하는 것처럼 입을 벌리자 체리는 그 입에 담배를 던져 주었다. 목구멍에 빠질 뻔했잖아! 불만 섞인 소리는 가볍게 무시하고 이번엔 주머니에서 주사기 비슷한 것을 꺼냈다. 에단은 체리가 빨던 담배를 마저 빨고 체리는 주사 바늘을 솜으로 닦았다. 에단의 입술에 립스틱이 아무렇게나 뭉개져 있다. 체리는 엄지 손가락으로 에단의 아랫입술을 닦아 주었다. 이미 착색된 빨간 립은 어째 피처럼 보였다.


칭세퐁 지하는 동물들의 소굴을 방불케 했다. 아편이 유통되고 가끔 지상에서부터 시체 몇 구가 떨어진다. 살인 의뢰를 받은 도적떼들은 부자를 등처먹은 사창가 접객들을 죽이러 오고 몇몇 간 큰 아이들은 건수를 잡으러 스스로 내려오곤 했다. 다 낡아 기울어진 벽면에는 피로 쓰인 글자가 있다.


[Kill]


의무 교육도 안 받은 주제에 영어는 다들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아는 영어 단어 몇 없는 에단도 알 정도로 흔한 단어 한 개 쓰고 누군가는 여기서 죽어갔겠지. 체리는 등 뒤에 그딴 글자 적혀 있는 거 알면서도 아편이나 피워 댔다.


- 야. 비켜.

- 또 왜 그래?

- 기분 나쁘잖아, 저거.


체리가 다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크게 쉬더니 옆으로 슬쩍 자리를 옮겼다. 에단은 체리 옆자리로 기어가더니 손톱으로 글자를 긁었다. 피로 쓰여진 글자는 싸구려 벽과 함께 긁혀 나갔다.


- 그거 아냐. 키스랑 킬은 스펠링 하나 차이라는 거.


Kill은 이제 Ki…가 되었다. 글자를 쓰려고 바닥에 널부러진 립스틱을 들었는데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에단은 립스틱을 도로 바닥에 내려놓곤 대신 체리의 턱을 들어올렸다. 언제 봐도 예쁘긴 예뻤다. 예쁜 쌍년한테 사기당하면 영광이다 하고 넘길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 재수 없게 살인 청부나 하고 지랄이야. 체리의 가냘픈 팔에 꽂혀 있던 주사기가 힘없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편 때문인지 이년 눈이 벌써 회까닥 돌아 있었다. 에단은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체리의 입술을 손으로 거칠게 닦곤 손에 남은 립으로 벽에 곡선 두 개를 그렸다. 양이 얼마 안 돼 두 번째 글자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 야. 체리.


에단이 체리의 이름을 막 불렀다. 그러고선 주인 잃은 똥개마냥 안절부절못하면서 주변 눈치 살피더니 자길 봐달라는 듯 체리에게 낑낑댔다. 보다 못한 체리가 겨우 정신줄 잡고 에단과 눈을 마주쳤다. 에단은 잠시 고민하더니 벽을 향해 목짓하며 말했다.


- 키스해줘.


벽에 쓰인 글자는 이제 [Kiss]가 되어 있었다.


키스해줘. 그 말이 둘만의 신로라도 되는 양 서로의 멱을 잡곤 혀를 마구잡이로 맞댄다. 에단은 이제 파블로프의 개처럼 키스란 말만 들어도 입을 내밀었다. 체리의 숨이 에단의 목구멍 깊이 들어갔다가 에단의 숨으로 도로 나왔다. 이건 아무리 여러 번을 해도 질리지가 않는다. 얽힌 혀가 풀리고 섞인 침이 주욱 늘어졌다. 체리. 에단이 속삭였다. 체리. 체리. 몇 번이고 속삭였다.


- 네 본명 말이야. 체리.

- 뭐?

- 네 본명. 진짜 체리더라.

- 어떻게 알았어?


에단은 대답 대신 입술을 박았다. 체리가 떼어내려 했으나 그녀가 아무리 잘났어도 에단은 주기적으로 운동 하는 건장한 성인 남자였다. 숨이 막힐 것처럼 키스하다가 에단은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몰아 쉬는 숨이 황홀했다.


- 그리고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

- 미친 놈.

- 너 스물 셋이잖아.


그 말에 체리가 얼척 없다는 듯 웃었다. 어쨌건 웃은 건 좋다는 뜻 아닌가. 에단도 마주 웃어주었다. 본명을 알거나 나이를 알거나 하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상대가 체리이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래선 안 될 사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체리를 죽이지 않으면 언젠간 브로커가 다시 찾아오겠지. 에단은 언제까지고 체리를 죽여야만 하는 압박에 시달리며 살 것이다. 아직 체리에 대해 아는 것은 쥐똥만큼밖에 없고 어쩌면 에단 또한 체리의 사기 명단에 이미 들어가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에단은 체리가 좋았다. 그 사랑이 제가 느끼기엔 꽤 낭만적이라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세 시간의 예약 시간은 언제나 빛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에단은 밖에 멍하니 서서 칭세퐁의 꼭대기 층을 바라봤다. 높고 화려하다. 여느 클럽이 그렇듯.


선택은 구룡채성에서뿐이다. 감옥에 갖힌 것처럼 이 어둠 속에서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에단이 아는 케이로 시작하는 영어 단어는 키스 그리고 킬밖에 없어서 평생토록 에스 그리고 엘 중에 하나를 고민하는 운명에 갖혀 있어야만 했다.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맞으면서 에단은 화려한 네온 사인 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억지로 웃으면서. 미소 지으면서. 그러면 정말 모든 게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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