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에는 이름이 없었다.
지도에도, 기차 시간표에도,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땅.
오직 새벽이면 내려앉는 안개만이
마을의 윤곽을 어루만졌고,
사람들은 그 흐릿한 풍경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반쯤 잊은 채 살아갔다.

안개는 모든 것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사랑도, 분노도, 심지어 생의 의지도.

그러나 단 한 사람,
그 모든 흐림 속에서도
분명한 기다림을 품은 자가 있었다.

그는 마치 고요한 물결처럼,
매일 아침 안개를 가르며 길을 걸었다.
나무 벤치 하나,
그 벤치는 마을의 끝자락, 세상의 변두리에 있었다.

그곳에 도달하면, 그는 숨을 고르고 앉았다.
늘 같은 자리에,
늘 같은 말투로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 오늘의 안개는 좀 늦게 피어났군.
그대는 잘 쉬었소?
어젯밤엔 그대가 내 꿈에 들렀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르익은 첼로 같았고,
그 말들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묵직한 부드러움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나연.
열다섯의 감성은 아직 단단해지지 않았지만
그 최대한의 마음으로
노인의 침묵과 독백을 품었다.

:: 할아버지, 거기엔 아무도 없는데…
누구랑 말씀하세요... ?

그는 시선을 멀리 두고 대답했다.

:: 이 자리는 나의 모든 계절을 함께 지났고,
마지막 겨울을 홀로 맞이했던,
그런 사람의 자리란다..

:: 지금은 어디 계시는데요 ? ..

노인은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 동작은 마치
누군가의 무게가 여전히 어깨 위에 얹혀 있는 듯했다.

:: 안개 저편.
혹은, 내 기억보다 더 먼 곳에.

그의 기억 속, 그녀는 가람이었다.
잿빛 머플러와 흐린 눈동자,
늘 바람을 마주하던 여인.
서울의 화사한 도시 한복판에서
가람은 흐린 색으로만 세상을 그렸다.

:: 세상이 너무 선명할수록,
내 마음이 다쳐버릴 것 같아...

한규는 그녀의 그림 속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들었다.
빛도 박수도 없는 그 침묵 속에서,
그는 첼로의 활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폐는 점점 좁아지고,
숨은 점점 가늘어졌으며,
결국 그들은 빛을 피해
안개를 품은 이 마을로 왔다.

가람은 말이 적었다.
대신 매일 아침.
안개를 가르며 벤치까지 걸었다.

“여긴… 우리 둘만의 계절이겠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아무 소리 없이
그녀는 사라졌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흔적 없이.

이후 한규는 26년을 기다렸다.
한 계절도 빠짐없이.
한 새벽도 예외 없이.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그는 벤치에 앉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오늘은 꽃잎이 일찍 졌더군.
•••
:: 그대가 좋아하던, 자주색 붓꽃이 피었소.
•••
:: 아직,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끔 그는 첼로를 꺼냈다.
활은 떨렸고, 음계는 무너졌지만
그 곡은 가람을 위한 기도였다.

그날,
안개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색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리운 그 흐림을 찾으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한규는 벤치에 없었다.

그의 집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방 안은 조용했고,
탁자 위엔 오래된 그림 한 장.
가람이 그렸던, 안개 속 두 사람.

그 옆에,
한 장의 편지.

| 그대.
나는 당신을 잊지 않았소.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흐릿해지고,
내 이름조차 낯설어질 때도—
당신만은 흐려지지 않았소.

오늘, 안개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 같아서,
이제는… 내가 가렵니다.

이 벤치는, 이제 비어 있지 않소.
여긴, 우리 둘의 자리입니다. |

며칠 후,
나연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고,
바람이 어깨를 스쳤다.

그건 분명히
누군가의 숨결같았다.

'잘 가요, 할아버지.
다시 만날 그날까지.'

그리고,
그 마을은 처음으로 이름을 얻었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고
끝까지 잊지 않는 마음의 형태.

–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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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8.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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